공포물 안에서 공간적 배경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 작품 속에서 어떤 장소를 구축해내느냐가 이야기의 완성도와 분위기에 영향을 준다. 공포물이 그리는 공간은 주로 폐쇄된 곳이나, 때로 아주 넓은 곳일 때도 있다. 일례로, 아르젠토 감독의 <서스페리아>에는 시각장애인인 등장인물이 사방이 트인 광장에 홀로 서 있는데 안내견이 경계하듯 마구 짖는 장면이 나온다. 뻥 뚫린 대낮의 공포를 담아내는 교과서적인 시퀀스라고 할 수 있다. 일월명 작가의 <대공원> 역시 제목에서 드러나듯 밝고 개방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기괴한 일들을 그려낸다. 소설을 톺아보기 전에 되짚어본다. 그렇다면 사람이 많고 드넓은 곳이 공포의 공간이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거기 있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을 때다. 우리는 폐쇄된 공간에서 생겨나는 끔찍한 사건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탈출함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광장에조차 내가 믿을 존재가 없다면,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일월명 작가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찾는 놀이공원이라는 장소를 택함으로써 이러한 보편적 공포와 주제의식을 만나게 한다.
1. 대공원에 갇힌 아이들
소설은 대공원이라는 하나의 공간적 배경을 주요 장소로 택하고, 여기에 현재와 과거라는 시간적 배경을 교차시킨다. 아동이던 화자의 이야기는 과거에, 아동인 화자의 자녀 이야기는 현재에 머문다. 두 이야기가 공명할 수 있는 까닭은 화자 또한 아동이던 시절이 있었고, 그래서 ‘대공원’에 가보았기 때문이다. 이때 대공원은 아동기의 경험을 상징하는 메타포가 된다. 소설에서 현재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초반부, 어른들도 대공원에 가느냐고 묻는 아이에게 부부는 ‘어른들은 다른 일을 하느라 그런 곳에 갈 시간이 없다’고 답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화자가 아이를 소풍 보내기 전 어떤 약속을 하기까지, 이들은 모자 관계이지만 단절을 경험한다. 그러다 엄마인 주인공이 자신이 겪어낸 어린 날의 ‘대공원’과 지금 자신의 아이가 겪어내고 내일도 겪을 어린 날의 ‘대공원’을 내면에서 연결 지으며 비로소 어른과 아이인 두 인물은 단절을 넘어 연결된다. 그렇다면 대공원은 대체 어떤 장소일까.
놀이공원이 보여주는 표면적인 이미지는 이렇다. 알록달록한 놀이기구가 돌아가고, 폭죽이 터지고 함성과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기구를 정비하다 사고를 당한 직원, 땡볕에 일하는 상인들, 그리고 유괴되거나 길을 잃거나 버려지는 아이들이 있다. 놀이공원이나 서커스, 광대 같은 것들이 공포물의 소재로 쉬이 채택되는 까닭은 여기 있을 것이다. 다만 <대공원>은 놀이공원이 가진 그러한 모순적 이미지를 아동에 대한 은유로 가져온다. 비슷한 클리셰를 다루는 공포영화 <어스>의 경우도, 대공원에 놀러간 아동이 부모의 손을 놓친 후 미지의 공간으로 흘러 들어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때 아이가 들어가 버린 공간은 현실 세계 속 약자들의 공간이며, 동시에 그 약자들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파괴되어가는 곳이다. 이때 <어스>가 다른 작품들과 차별점을 갖는 지점은 인종 이슈를 다룬다는 것이다. 반면 <대공원>은 아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대적 기득권이자 주류인 성인들이 아동을 바라보는 시선, 그들에게 덧씌우는 이미지는 어쩌면 대공원을 향한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통통한 볼, 앙증맞은 몸짓, 요정 같은 언어, 어른이 시킨 애교. 우리는 이렇듯 이상화된 이미지를 아이들에게 덧칠하고 덧칠한다. 길 잃은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사고당한 직원의 비명을 덮어버리는 놀이공원의 요란한 음악처럼, 과장되게 밝은 페인트로 칠해진 회전목마처럼. 이런 대상화는 약자를 향한 세련된 혐오로서 기능한다. 그 대상이 아동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동이 얼마나 약한 존재이고 그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지, 그래서 그들의 보호자, 심지어 친부모조차도 언제고 얼마나 끔찍한 학대를 저지를 수 있는지 말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아동의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을 강조한다. 소설에서 대공원으로 표상되는 아동기 안에 어떤 치열함과 두려움, 어두움과 폭력이 존재하는지 아는 것은 오직 그곳에서 길을 잃은 아이뿐이다. 그래서 화자는 아이를 찾기 위해 자신이 어릴 적 대공원에서 마주했던 학대당한 아이들, 그들과의 조우 자체가 아동인 자신에게 남긴 또 다른 폭력적 경험, 거기서 도망쳐 나온 자신과 거기 남은 아이들을 기억해낸다. 그럴 때야 아이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2. 대공원을 나온 아이들
소설에는 크게 세 아동이 나온다. 대공원에서 도망친 아이, 대공원에 갈 아이, 그리고 대공원에 영원히 남은 아이들. 그리고 이들 모두 정도와 양상은 다르나 아동학대를 경험한다. 대공원 안 이상하고 은밀한 공간에서 도망쳐 나온 화자는 자신의 아이를 보며, 대공원에 남았을 ‘고등어같이 이상한 눈을 가진 아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구역감을 느낀다. 이 구토는 결국 자신도 아이를 대공원에서 잃을 뻔한 가해자로서의 성인이라는 자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인식 아래서, 화자는 ‘선생님을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아이에게 그러면 길을 아는 엄마가 찾으러 가겠노라 약속한다. 대공원의 화려한 폭죽과 신나는 음악에 눈과 귀가 가려진 어른들은 그곳에서 아이를 잃고, 찾지 않고, 잊는다. 다만 그 안 어딘가 가려진 곳에 검붉은 장미로 이루어진 길과 까만 물이 나오는 분수가 있으며, 거기에 죽은 생선과 같은 눈을 한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어른만이 살아있는 아이를 찾아낸다. 나 역시 그곳에서 길을 잃었음을 기억할 때야 우리는 ‘바깥으로 나가도 괴롭기만 할 것’이라는 아이들을 손잡고 되찾아올 수 있다. 도망칠 안전한 곳이 있다고, 탈출 후에 뺨을 때리는 어른이 아니라 너를 찾아 다행이라고 안아줄 어른이 있다고 아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대공원은 길을 잃기 쉬운 곳이고, 아이를 잃지 않는 것은 아이가 아닌 어른의 책임이니까. 이야기 속 화자의 유년기 기억 속 대공원의 이면은 환상적 공간과 인물이면서 동시에 현실에 생생히 존재하는 어딘가의 누군가다. 그러므로, 어른이 되었어도, 우리는 어린 날의 그 검붉고 좁은 통로를 기억하고 잊혀버린 아이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럴 때야 비로소 대공원을 벗어날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