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은 최근 문학 장르 안의 페미니즘 리부트로 인해 많은 창작자의 관심을 받는 원형 이야기다. 소설가 하성란1과 홍콩의 추리소설가 찬호께이2, 프랑스의 작가 아멜리 노통브3 등 소설가뿐 아니라 최근 국내외의 콘텐츠 기획가와 작가, 미디어들이 주목하는 이 동화는 역설적으로 여성 혐오의 극단인 ‘여성 살해’를 포함한다.
동화 「푸른 수염」에는 푸른 수염을 가진 미지의 사내와 그가 결혼하고자 하는 두 귀족 여성이 등장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푸른 수염은 자매 중 둘째와 결혼하게 되고 그의 아내는 벽장을 열어보지 말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러나 푸른 수염의 아내는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 금기를 깨고 벽장을 열고 만다. 그 안에는 푸른 수염이 죽인 그의 이전 아내들의 시체가 전시되어 있다. 끔찍하게 여성을 살해 후 시신을 보관하는 푸른 수염의 태도는 극악무도하다. 「푸른 수염」이 페미니즘 안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이유는 ‘여성이 죽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창작자가 적극적으로 「푸른 수염」 안에서 여성을 부활시키고자 시도하고 있다. 죽어야만 했던 푸른 수염의 수많은 아내들이 하나둘 부활하고 있다. ‘그녀들’은 되살아날 뿐 아니라 푸른 수염에게 복수를 꾀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이야기에서 죽었던 여성을 소생하는 작업. 사라졌던 여성을 복원하는 작업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동화는 단연코 「푸른 수염」이다. 그 안에서는 너무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한 남자의 손에 죽었던 여자들은 단지 그와 ‘결혼’했을 뿐이다. 결국 ‘아내’라고만 나오는, 이름 없는 한 여성이 오빠들의 도움을 받아 푸른 수염의 연쇄 살해를 막는다. 그녀는 푸른 수염의 진실을 깨닫고 찰나의 지혜로 죽어가는 여성의 대를 끊는다. 그녀의 지혜는 「푸른 수염」 안에서 여성을 복원하는 많은 작가의 영감이 되었다. 여성이 여성을 구하는 이야기. 지금 가장 뜨거운 이 동화의 각색에서 진짜 살아나야 하는 것은 ‘한 번 죽었던 여성’이다.
귀성길에 만난 푸른 수염
미타 작가의 단편 〈귀성〉을 읽고 푸른 수염이 떠오른 것은 당연하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쓰는 데에 동화 「푸른 수염」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설의 미스터리한 플롯과 공포스러운 분위기, 미스터리한 남자에 의해 죽은 여러 여자 등의 요소를 통틀어 보았을 때 이 소설의 진행은 동화 「푸른 수염」의 플롯과 매우 유사하다. 만약 〈귀성〉이 「푸른 수염」의 재창작이라면 성공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원작 특유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현대의 배경에 맞게 소설로 옮겼으며, 원작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반전을 적절히 삽입했기 때문이다.
늦은 시간, 귀성길에 오른 한 가족이 있다. 어머니의 집으로 향하면서 자신의 고물 내비게이션을 고칠 생각도 않고,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끝내 차를 몰아야 직성이 풀리는 영석의 등장은 소설의 처음부터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영석의 무모함은 그가 길을 잃을 것임을 분명히 암시한다. 길을 잃은 영석과 수향, 그리고 둘의 딸 다혜는 길을 잃고 점점 더 고립된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절벽 지대로 몰린다. 인물들이 궁지에 처함에 따라 독자의 마음도 점점 초조해진다. 옴싹달싹 못하던 그들에게 구원처럼 나타난 건 하나의 저택이다. 자동차에 탄 가족들은 한 저택의 주인에게 하룻밤 묵으라는 허락을 받고 기뻐하지만, 독자에게는 궁지의 끝에서 발견된 그 장소가 으스스하게 느껴진다. 밀실. 주병하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의 저택이 밀실이라는 걸 독자는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여느 공포 소설의 밀실이 그렇듯, 이 저택도 보통은 아니다. 영석은 가볍게 묵으려던 그날 밤, 물을 마시러 나간 거실에서 미지의 혼령을 보고 그대로 쓰러진다. 그는 앓아눕고 가족들은 예상보다 오랜 시간 저택에 머물게 된다. 이렇게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를 저택에 미리 깔아두는 것은 저택의 ‘공간’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 이 안에서는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이며, 독자들은 머지않아 그 사건을 마주하리라는 복선인 것이다. 주병하의 나이를 특정할 수 없다는 점, 그의 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정부가 한 명 있다는 점 등은 공간의 기이함을 더한다. 이 으스스함은 다혜의 행동 끝에서 발견되는 ‘금기’와 효과적으로 연관된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지루하게 여긴 다혜가 동물을 좇아 들어간 창고는 공간에서 오는 공포를 극대화한다. 둥그런 해골과 미끈거리는 바닥. 가정부가 다혜를 찾아 들어올리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가정부와 주병하가 파놓은 함정에 세 가족이 빠져버렸다는 확신을 갖는다.
다혜가 가정부에게 붙잡힌 후, 수향이 다혜를 찾아나서며 공포는 고조된다. 산에서 수향이 발견한 건 “‘주병하의 아내’, ‘주병하의 딸’, ‘주병하의 딸’, ‘주병하의 아내'”라고 쓰인 일종의 위패다. 이름이 지워진 채 누군가의 딸과 아내로만 남은 여자들, 이 소설에 이름조차 실리지 않은 ‘그녀들’의 죽음이 “공동묘지 부지”에 무심히 널려 있다. 푸른 수염의 아내가 벽장에서 발견한 여자들의 시체처럼. 작가는 자칫 자극적인 소재에 그칠 수 있는 원작의 살인을 에둘러 드러낸다. 그것이 이 소설에서 보이는 가장 큰 장점이다. ‘주병하가 여자들을 죽였다’라는 단순하고 선명한 자극이 ‘위패’라는 상징물을 통과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얻는다. 위패의 이미지는 ‘여자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뚜렷하게 만드는 동시에 살인의 잔인함만을 덜어낸다.
수향이 저택에 돌아온 후 치러지는 의식에서 독자는 푸른 수염의 마지막 아내가 끝내 그를 살해하는 결말을 떠올린다. 주병하의 집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가정부 미진은 동화 속 마지막 아내의 역할을 한다. 다만 원작 속 그녀가 오빠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과 달리 이 의식에서 병하를 죽이는 건 미진과 수향이다. 두 여자들은 그녀들의 목숨과 다음 여자들의 생명을 구한다. 측정하지 못하는 세월을 통과한 괴물 같은 남자의 손에서. 이 소설의 맺음부는 여자들의 협력과 화해로 이루어진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다음 날을 맞는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더 나아가기
서두에 언급했듯 동화 「푸른 수염」은 최근 수많은 미디어의 재창작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쓰며 「푸른 수염」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동화를 알고 있는 독자는 소설 〈귀성〉이 그 이야기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는 감상을 피할 수 없다. 때문에 이 단편은 (원하든 원치 않든) 다양한 비교대상을 가지게 된다. 다양한 푸른 수염과 그의 마지막 아내가 등장하는 현대의 재창작 소설은 추리와 공포에 뿌리를 둘 수밖에 없으며, 독자가 ‘한 남자와 그에게 희생된 여성들’이라는 플롯을 미리 숙지하고 있는 이상, 이 소설에서는 ‘참신함’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미타 작가는 이 참신함을 컬트적인 요소에서 찾으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더 젊은 남자의 몸을 얻어 ‘대를 이으려는’ 주병하의 의식은 공포 분위기를 보존하는 동시에 소설을 기묘하게 바꾸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드는 한 가지 사소한 의문은 주병하가 원하는 것이 ‘대를 잇는 것’뿐이라는 데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작 동화 「푸른 수염」에서 푸른 수염이 자신의 아내들을 죽인 이유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재창작하는 작가들의 입장에서 가장 자유로우면서도 곤혹스러운 부분 또한 이것이다. 푸른 수염이 여성들을 차례로 죽인 까닭을 나름의 기준으로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귀성〉에서 주병하의 캐릭터는 미스터리하다. 원작의 푸른 수염이 잘 알려지지 않은 남자라는 점과 일맥이 통한다는 점에서 그의 미스터리가 소설 안에서 어떻게 작동할지 독자는 주목하게 된다. 푸른 수염보다 훨씬 오랜 시간 여성을 죽인 주병하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만약 ‘대를 잇는 것’의 소망이라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의아하다. (물론 원작의 푸른 수염은 이유도 없이 여자를 죽였지만) 인물의 ‘욕망’과 그것을 실현코자 하는 시도가 명백히 드러난다면, ‘욕망’은 독자에게 설득력 있어야 한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살아온 주병하가 여자를 죽인 이유가 명확하게 설명될 때 결말의 미진과 수향의 행동이 납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초월하는 인물인 병하가 사람을, 특히 여자를 죽이기로 마음 먹은 데에는 좀 더 신비하고 타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그의 묘한 분위기가 이미 독자들을 공포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니 인과의 촘촘함이 채워진다면 좀 더 완성도 있는 소설이 되리라 기대한다.
병하의 기묘한 인물성이 구축된다면 우리는 미진에게 눈을 돌리게 된다. 미진은 결말에서 푸른 수염의 마지막 아내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조금 갑작스러운 면이 있다. 처음에 영석의 가족에게 미진은 차갑게 대한다. 물론 병하의 명령도 있었겠지만, 미진의 태도는 그 이상으로 딱딱하게 묘사된다. 그 가족을 도울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듯이. 미진에게는 아주 오래 전부터 병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병하에게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 그런 미진에게 일종의 ‘제물’로 바칠 수 있는 한 가족이 제발로 들어왔다. 그들을 병하에게 잘 바치면 길게 이어지던 고통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마주한 미진에게 영석의 가족을 이용할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을까. 이는 미진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한 예시다. 미진은 이 소설의 후반부까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병하의 집에 마지막으로 남은 여자라는 점에서 독자는 은연중에 미진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쓰게 된다. 미진의 감정선을 어떻게 매만지느냐에 따라 이 소설은 수많은 갈래로 해석될 수 있다. 미타 작가에게는 묵직한 문장으로 자신의 글에 메시지를 담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그가 미진을 좀 더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볍지만 진지하게 해본다.
글을 맺으려다 보니 이 소설을 지나치게 동화 「푸른 수염」과 연관지은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마음이 있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는데 스스로 넘겨짚은 부분이 있다면 심심히 사과를 전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소설이 「푸른 수염」과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열어두고 읽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정말 「푸른 수염」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작가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다행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자신이 쓰고자 하는 하나의 소설과 유사한 다른 이야기를 읽는 경험은 시야를 넓혀주기 때문이다. 샤를 페로의 「푸른 수염」은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과 나란히 두기에 더욱 적합하다. 원형 동화의 작가가 짧은 분량 안에서 얼마나 극단적인 공포를 설정하는지, 그 찰나에 얼마나 날카로운 증오가 여자들을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가 작가뿐 아니라 독자의 지평을 확장해주리라 생각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살려야 하는, 살아내야 하는 여성의 삶이 얼마나 많은지 감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