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특히 1인 여성 가구가 늘어나면서 안전을 위한 방범창이나 감시 카메라, 자물쇠 등의 보안 용품이 각광받고 있습니다. 각박한 현대 사회, 내가 나를 건사하기도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 챙겨야 할 것도, 조심해야 할 것도 너무 많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지수라는 여자입니다. 하지만 혼자 살고 있지는 않은데요, 몇 개월 전 남편과 이혼하면서 데려온 딸, 세나와 함께입니다. 당연히 혼자 사는 것보다 더욱 버거운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출퇴근도 해야 하고, 아이도 돌봐야 하고. 설상가상으로 연이은 야근 때문에 하원하는 세나를 챙기러 갈 시간도 맞추기 어렵습니다. 그런 지수에게 마치 준비된 선물처럼, 행운처럼 다가온 은수.
첫 만남은 은수가 세나의 목숨을 구해 주면서 시작됩니다. 갑작스럽게 아이를 돌봐 주던 이모님이 일을 관두게 되면서 당장 오늘 세나를 챙길 사람이 없어집니다. 지수는 급하게 반차를 내고 세나를 데리러 갑니다. 미술 학원 버스에서 내리는 세나가 멀리에서 보이는 타이밍에 맞춰 마을버스에서 내린 순간, 커다란 트럭이 세나를 덮쳐옵니다. 달려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 다급한 마음에 이름을 부르는 순간, 누군가 세나를 인도 쪽으로 확 당겨 위험한 순간을 모면합니다.
세나를 구해 준 사람은 아파트 1층 상가에서 꽃꽂이 교실을 운영 중이던 삼십 대 중반의 여성, 은수였습니다. 오후 5시쯤 수업이 끝나는데, 언제나 창밖으로 아이들이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택배 차량이나 마트 배달 트럭이 오고 가는 터라 아이들이 다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고. 그렇게 지수와 은수는 서로 인사를 하게 되고, 조금씩 가까워집니다.
미국에 가족들이 있는 은수는 결혼 직전까지 간 남자가 있었지만 작년에 헤어졌다고 합니다. 혼자 지내고 있었기에 외로움이 컸던 건지, 아니면 원래 마음 씀씀이가 고왔던 건지. 은수는 먼저 제안합니다. ‘괜찮으시면, 저녁에 바쁘실 때 저한테 아이 맡기셔도 돼요.’ 마침 아이 돌봐 주는 이모님을 새로 찾아봐야 하기도 했고, 친정집에 매번 부탁하기도 미안했던 지수는 시급을 계산해주려 하지만 은수는 그것도 거절합니다. 이웃끼리 돕고 사는 거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은수는 너무나 훌륭하고 완벽한 베이비 시터가 되어 줍니다. 지수가 이모님을 새로 구할 때까지, 안전하게 세나를 픽업하고 집으로 데려와 맛있는 간식도 만들어 주고 정성 가득한 저녁도 차려 줍니다. 미술 놀이나 술래잡기로 세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 주는 덕분에, 세나를 데리러 갈 때면 세나는 이모랑 더 놀고 싶다고 칭얼거리는 정도입니다. 이모님이 구해지고 나서 은수가 세나를 돌봐 주는 건 월말의 며칠 정도가 되었지만, 사이는 오히려 더 돈독해집니다. 함께 저녁을 먹기도 하고, 세나를 재우고 둘이서 캔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안방에서 함께 잠들기도 하는, 유사 가족과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은수는 지수의 삶에 깊게 침투합니다. 친정 엄마도 은수를 퍽 기꺼워하고 예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죽하면 ‘수양딸 삼으라’는 지수의 말에 ‘그래. 내가 엄마 하지 뭐.’ 라고 스스럼없이 대답할 정도로. 더 나아가 엄마는 지수에게 재혼할 생각 하지 말고 은수가 결혼 못 하면 그냥 둘이서 살라는 말도 꺼냅니다.
그때부터였을까요. 마냥 다정하고 좋은, 최고의 이웃이던 은수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시점이.
은수는 지수와 세나와 함께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을 찍자는 제안도 합니다. 그때만 해도 지수는 은수가 많이 외로운가 보다, 세나를 이렇게 정성껏 돌봐 주는데 사진 한 장 정도야, 같은 생각으로 넘겨 버립니다. 살펴보면 은수의 행동과 말투에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가까이 다가가서, 그 자리가 익숙해지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또 그 자리가 익숙해지면 다시 한 발자국. 그런 식으로 아주 천천히, 조금씩, 거부감이 들지 않게 간격을 좁히는 은수.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칫솔 세 개가 함께 꽂혀 있는 걸 보며 진짜 가족 같다고 감격하고.
은수의 허벅지에는 수많은 자해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사무치도록 외로웠던 은수가 혼자인 시간을 견디기 위해 저지른 일. 그 정도로 혼자라는 걸 싫어하는 은수는, 지수의 삶에, 그리고 가족 관계에 조금씩 파고듭니다. 지수네 어머님과 아버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 자리를 손꼽아 기다리고, 정성스러운 선물을 준비하고, 그 이상 좋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좋은 인상을 남기고 옵니다. 지수네 엄마는 물론이고 아빠도 은수에 대한 칭찬이 입에서 마르질 않습니다. 더 나아가 은수는 지수 어머님에게 드릴 선물을 고민하며 앞으로의 만남과 인연을 계속 기약합니다.
좋게 보자면 사람이 싹싹하고 정이 많고, 살뜰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지수는 어쩐지 불안하고 불쾌합니다. 아무리 신세를 졌다 해도 생판 남인 걸요. 어쩌면 은수의 허벅지에 남은 흉터가, 혼자를 견디지 못하는 그 성정이, 이상하리만치 살갑게 구는 그 태도가 부담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수는, 은수에게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빼앗겨 간다는 위기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은수는 세나를 끌어안고 무언가를 속삭입니다. 어쩐지 우리 딸, 같은 입 모양입니다.
은수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걸까요. 불편함을 느낀 지수는, 곧 다가오는 아빠 생신날에 은수를 초대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가족 행사니까, 외부인인 은수를 초대하지 않는다 해서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은수가 통화 내용을 듣고 ‘다음 달이 아버님 생신이냐’고 물었는데도 응, 이라는 대답밖에 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리는 정도일까요. 그냥 지나가듯 너도 올래? 하고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하지만 은수는 당연히 가겠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지수는 그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고요.
그랬는데도 은수는 아버지의 생일잔치 장소에 등장합니다. 심지어 그냥 온 것도 아니고, 장소 자체를 은수가 예약하고 생일 파티를 준비한 것처럼 보입니다. 당황하는 지수를 내버려 두고 온 가족이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이런 장소를 찾았냐며 은수를 칭찬하고, 은수와 처음 만나는 올케와 희민이도 전혀 어색함 없이 어우러집니다. 모두가 행복하고 완벽한 가족처럼 보입니다. 그 공간에서 오히려 이방인은 지수입니다. 홀로 은수를 꺼림칙해하고, 이 기이한 상황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은수는 마지막으로 가족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좀 더 다정하게, 좀 더 웃으면서. 사진 작가가 된 은수는 즐거워 보입니다. 그때 엄마가 은수에게 제안합니다. 너도 같이 찍자. 아빠는 종업원을 불러와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려는데, 엄마는 귀찮게 그럴 필요가 뭐 있냐며 지수를 앞으로 보냅니다. 지수는 엉겁결에 은수의 핸드폰을 받고 자신이 빠진 가족사진을 찍어 줍니다. 세나 옆에 선 은수. 부모님과 희민이네. 너무나 자연스러운 한 장의 가족사진에는, 빠진 사람도 부족함도 없어 보입니다. 지수가 없는데도, 그 장면은 완벽합니다.
그리고 지수는 은수와의 결별을 다짐합니다. 이상하잖아요. 은수처럼 눈치 빠른 사람이, 초대받지도 않은 자리에 구태여 올 이유가 없는데도 은수는 지수에게 비밀로 하면서까지 왔습니다. 은수가 목적하는 건 지수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그저 가족이 되고 싶었던 걸까요. 어느 쪽이든, 소름 끼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도 있을 곳 없고 혼자 외로웠던 은수는 어디에라도 연결 고리를 만들어 두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생신 잔치 장소를 정하고, 그 장소를 꾸미고, 날짜를 잡기까지 어머니와 또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지수 모르게. 일부러 지수를 소외시키고 있는 걸까요.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지수는 의도적으로 지워지고 있었습니다. 은수에 의해서.
은수가 사 준 물건과 집에 있는 은수의 물건들을 모두 정리하고, 이사 갈 집을 알아보고, 현관 비밀번호도 바꾸고. 쇼핑백에 가득 담긴 물건들은 이사 가는 날 전해 주고, 그전까지는 연락을 피하자고 다짐했건만 은수는 좀처럼 연락이 없습니다. 언니, 미안해요. 라는 문자 한 통뿐. 아마 눈치가 빠르고 예민하기에 인연이 끝났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겠죠. 지수는 그렇게 안도합니다.
그때 부동산에서 전화가 옵니다. 매물이 나왔나, 싶어 전화를 받은 지수는 충격을 받습니다. 지수가 방문한 그 부동산에 은수가 전화했던 겁니다. 25평짜리 전세를 구하던 지수와 같이 살기 위해, 친척이라고 거짓말까지 하며 30평 매매를 구한다고. 지수는 집으로 돌아와 은수를 찾아갑니다. 쇼핑백을 건네주고, 완전한 관계의 끝을 선언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정리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사 날. 텅 빈 집에 지수는 혼자입니다. 창밖으로 은수와 낯선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딸로 보이는 세나 또래의 아이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입니다. 은수는 또 다른 목표물을 찾은 것처럼 보입니다. 홀로 딸을 돌보아야 하는 여자. 지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은수는 그 여자의 삶에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침투할 겁니다. 대가 없는 호의를 보여 주면서, 아이를 정성껏 돌봐 주고, 사랑해 주고, 그러다가 서로의 집에 스스럼없이 찾아가는 사이가 되고. 그렇게 덩굴이 나무를 감싸듯, 천천히 감싸고 옥죄어 뿌리를 내릴 겁니다.
지수는 생각합니다. 왜, 그날 아무도 세나를 구해 주지 못한 걸까. 그날따라 왜 건물 앞은 그렇게 혼잡했고, 세나는 왜 얌전히 앉아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뛰쳐나간 걸까. 왜 하필 그 순간 승용차가 와서. 세나가 사고를 당한 그 길가에는 은수의 가게가 보였습니다. 어쩌면 은수가 그 가게 안에서 세나를 부르지는 않았을까요. 오랫동안 은수를 만나지 못한 세나는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뛰쳐나간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하지만 증거는 없습니다. 지수는 아버지의 생일잔치 날 자신이 찍어 준, 은수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보내 준 사진을 봅니다. 그 사진 속에서 은수는 웃지도 않고 사진을 찍고 있는 지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속 은수가 지수를 바라보며 묻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세나는 이미 죽었다면 어떠냐, 고.
지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진을 지워 버립니다.
은수라는 기묘한 인물의 정체가 글을 읽음에 따라 점점 드러나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수도 은수의 호의와 배려를 달가워하고 반가워했죠. 은수는 그렇게 지수에게 마음에 빚을 달아 둡니다. 내가 이만큼 잘 해줬으니까, 내가 이만큼 선을 넘어도 괜찮은 거죠? 내가 이만큼이나 해 줬으니까, 언니도 나에게 이만큼은 해줄 수 있는 거죠? 그런 식으로 은수의 침입을 허용한 지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은수를 떨쳐내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나쁜 짓을 한 건 아닙니다. 무언가 석연치 않다, 는 막연한 불안과 의심이 있을 뿐입니다. 은수가 초대받지도 않은 아버지 생일잔치에 끼어드는 것도 모자라 장소를 예약하고 모든 것을 준비한다는, 생판 남의 부모님을 그렇게 정성껏 챙겨 준다는 기행을 저지르기 전까지만 해도 지수는 은수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자책합니다. 세나를 그렇게 잘 챙겨 주는 고마운 은인에게 이 무슨 배은망덕한, 하면서요. 은수가 없었다면 곤란했을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닌 데다가, 은수의 행동에 콕 찝어 ‘너 이런 거 불편해. 하지 마. 잘못된 행동이야.’라고 말하기가 애매한 상황입니다. 이미 집 비밀번호를 공유할 정도로 가까워졌고, 지수의 집에 은수의 물건들을 놓아두고 지낼 정도로 편한 사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까워진 사이를 단번에 끊어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상대방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 경우에는 더욱.
은수는 정말 뭘 원한 것이었을까요. 정말로 지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생각이었을까요? 세나에게 우리 딸이라고 중얼거리고, 지수가 해야 했던 아버지 생일잔치 준비를 하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살갑게, 친근하게 구는 모습을 보면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획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철저하게 목표물을 탐색하고,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접근하고, 가까워지고, 마침내 한 가족이 되고자 했던 은수는 지독하게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뎌 하는 은수는 허벅지에 자해까지 했습니다. 은수의 정신 상태가 불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밤중에 지수의 집에 찾아와서 같이 자도 되냐고 묻고,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며 은수는 ‘이렇게 행복해 본 적이 없었어’라고 말합니다. 외로움이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나를 찾지 않고, 누구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공포와 불안. 나 하나쯤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슬퍼하지 않을 거라는 냉정한 현실.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도, 나를 위해 주는 사람도 한 명 없는 황량함. 현대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가 고독사라고 하죠. 사람이 죽었는데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고 알지 못해서 한참 뒤에 시체가 발견되곤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헤어진 은수는, 그래서 더욱 공포에 떨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혼자 삶을 살아내야 하는 두려움.
그래서 저는 은수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행동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수는 외로웠기에, 추운 사람이 온기를 찾아 파고드는 것처럼 지수와 세나에게 파고들었습니다. 어쩌면 은수는 가족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반겨 주는 사람이 있고, 외로운 밤에는 끌어안을 사람이 옆에 누워 있고, 밤에 악몽을 꾸면 찾아갈 사람이 있고. 무슨 일이 생기면 걱정해 주고,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축하해 주고. 힘들 때는 도와주고, 슬플 때는 같이 울어 주는 이상적인 가족. 섬세하고 예민한 은수는, 그래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가늠합니다. 처음에는 세나를 돌봐 주고 감사를 받는 정도로 만족했다가, 지수의 이웃이자 친구가 되고, 그러다가 반쯤 동거하는 것처럼 생활을 같이 하고, 더 나아가 지수의 가족들에게도 자신을 인식시키며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고자 합니다. 외롭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나를 아껴 주고, 사랑해 주고, 생각해 줬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은수는 지수와 자신이 특별한 관계라는 망상을 합니다. 만약 이 글의 장르가 호러가 아니라 로맨스였다면 은수와 지수가 서로의 불안이나 마음, 걱정 같은 것을 털어놓고 함께 미래를 계획하는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수는 은수와 함께 먼 훗날까지 사는 것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타인의 눈치를 잘 보고, 예민하고, 섬세한 은수는 지수의 거부감을 인지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나친 외로움과 자신이 맛보게 된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관계를 정리하고자 하는 지수를 왜곡합니다. 우리는 잠깐 다툰 거고, 곧 화해하게 될 거고, 다시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이전의 관계란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함께 세나를 돌봐 주며 하나의 가족처럼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은수는 정말로 지수를 사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랑한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은수의 행동에 꺼림칙한 부분이 너무 많죠.
조심스럽게 은수의 과거에 대해 추측해보자면, 결혼하기 전까지 갔다가 헤어졌던 그 남자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은수는 새로운 남자, 결혼할 상대를 찾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심리가 발동되었을지도요. 사랑받으며 사랑해 주고 가족을 꾸리고 싶었다면 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관심을 가졌을 텐데, 은수가 택한 방법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족 관계입니다.
혹은, 우연히 세나를 구해 주고 지수와 가까워지는 일련의 경험을 함으로써 한 번의 체험을 해 본 은수는 이 방법이 좋은 방법이라고 여기고 두 번째를 시도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쪽이 조금 더 그럴싸하다고 생각되는데, 은수가 세나를 구해 준 것이 지수에게 접근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은수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을 우연히 찾게 되었고, 그 방법에 점점 몰두하면서 더 깊은 관계, 더 끈끈한 관계가 되고자 무의식적으로 노력한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칠 듯한 외로움이라는 우울, 혹은 정신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고하고 지수가 거부감을 느끼는 현실을 왜곡하면서요.
마지막 장면은 자신을 거절하고 다시 외로움의 늪에 빠뜨린 지수에 대한 은수의 복수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은수의 광기, 혹은 정신적 문제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세나를 우리 딸이라고 부르면서까지 예뻐했는데도 일부러 유인하여 사고가 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세나도, 지수도 은수에게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랠 도구에 불과했던 겁니다. 은수가 지수를 사람으로, 한 명의 존중하는 사람으로 대했다면 그토록 자신의 외로움을 앞세워 무례를 저지르지는 않았겠지요. 은수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곁에 있어 줄, 자신을 혼자 두지 않을 누군가였고 그 누군가는 누가 되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마지막 부분, 은수는 딸을 혼자 키우는 또 다른 여성에게 접근하죠. 아마 지수와의 관계에서 있었던 실패와 실수를 보완하여, 이번에는 더욱 완벽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관계를 다져 나갈 겁니다.
이야기가 지수의 시점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은수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은수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왜 이러는지 우리는 추측밖에 할 수 없죠. 그래서 더욱 은수라는 존재가 공포로 다가옵니다. 마지막 장면은, 은수와의 관계를 끊어냄으로써 벗어났다고 생각한 지수에게 철저히 복수한 은수를 보여 주면서 더욱 소름이 끼치게 만듭니다. 지수는 세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세나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은수가 떠오르게 되겠지요. 은수는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며 지수를 잊겠지만, 지수는 이제 그럴 수 없습니다. 세나가 없는 텅 빈 집에서 껍데기만 남아,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채로 살아갈 거라고 자신의 삶을 예측하는 지수는, 뜻밖에 굴러온 행운을 덥썩 받아들였던 것에 비해 너무 큰 불행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대가 없는 호의는 돼지고기까지만 받아들여라, 소고기부터는 꿍꿍이속이 있는 거다, 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아다니는 요즘. 이유 없이 친절한 사람은 경계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내 상황이 곤란하고 힘들 때 뜻밖에 다가와 준 사람의 호의를 마냥 내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 생각 때문에 더욱 몰입되었던 좋은 글이었습니다. 멋진 작품을 써 주신 작가님에게 감사드리며, 부족한 감상 마무리하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