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흔의 절제가 아닌 포용의 고찰… <당신의 어둠을 안아요> 의뢰(감상)

대상작품: 당신의 어둠을 안아요 (작가: KRimmer, 작품정보)
리뷰어: 소나기내린뒤해나, 4시간 전, 조회 18

 

네 과거라는 게 마음의 병이 있어서 그랬던 거잖아.

이제 그 병이 나았고. 병 고쳐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건데, 그게 문제야?

아니잖아. 그건 진짜 좋아하는 감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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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마음의 병은 다루는 방식이 특별하기 마련이에요.

2.치료해야 하는 상흔, 치료되지 못한 상흔

3.강도현? 독자들은 그에 대해 알고 싶답니다.

4.어둠을 품어내야 한다는 그 고찰에 감사하며.

 

 

<본 리뷰는 “KRimmer”님으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작성한 리뷰이며, 연재된 회차를 전부 정독 후 작성되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1.마음의 병은 다루는 방식이 특별하기 마련이에요.

 

일반적인 질병의 치료 과정이 병원(病原)의 탐색과 물리적 혹은 약학적 제거라는 대결적 원리에 입각해 있다면, 정신적 질병을 다루는 치유의 과정은 전혀 다른 서사적 궤도를 그리기 마련입니다. 이때 치료를 행하는 주체가 상담가 혹은 테라피스트(Therapist)’로 명명되는 순간부터, 서사의 중심축은 병증 자체에서 그 병증을 안고 있는 ‘인물’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 불안증, 성도착 등 명확한 형태를 쥐기 어려운 내면의 응어리는 물리적 절제 대상이 아닌, 한 인물의 과거와 사유를 통과하며 해석되어야 할 대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상담 치료는 병을 분석하고 제거하는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해당 인물의 서사 자체를 관통하는 일련의 해석학적 과정이라고 본다면 상당히 그럴듯합니다.

 

이번에 읽은 <당신의 어둠을 안아요>라는 작품의 인상이 좋은 것은, 이 인물적 서사에 집중되고 있는 일련의 치료 과정에서 구조적으로나 서사적으로나 무척 이해도가 높다는 데에 있습니다. 테라피스트(Therapist)’라는 직업으로 명명된 강도현이 내면적인 상처로 인해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만나 치료하는 과정을 다룬 이 이야기는, 곧 이나경이라는 환자와 인연이 닿는 것으로 관계가 시작되며 내면의 병()이란 무엇으로 치유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기에 이릅니다. 물론 비평적 시선에서 바라볼 때, 이 작품이 상담 치료라는 소재를 다루는 전문성 면에서나 인물 간 개연성 형성 측면에서 일정 부분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소재를 다루며 획득하는 ‘치유’라는 키워드의 무게감은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습니다. 치료사 입장에서 인물의 내면에 밀착하여 서사를 구축해 나가는 이 방식이야말로, 작품이 치유의 본질에 답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감평문에서는 상담 치료라는 소재가 인물의 서사를 추동하는 방식을 살펴보며, 대비 혹은 대립되는 두 인물의 궤적을 마주보며 이 소설이 치유라는 주제를 어떻게 가시화하는지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독자적 관점에서 관찰되는 소설적 서사의 한계와 아쉬운 지점들 역시 함께 짚어볼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치료해야 하는 상흔, 치료되지 못한 상흔

 

흔히 치료를 다루는 의학 작품에서 치료 불가능성에 전제를 두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병증의 완치 과정에서 서사적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고, 임상적 기술의 탁월함을 부각하며 치료자의 기술적 솜씨를 부각하는 것으로 역할을 강조하기 마련이죠.

 

소설 <당신의 어둠을 안아요> 또한 여느 의학 소재를 다룬 매체에서 묘사되는 의사환자의 관계를 차용하지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주제적 지향점은 일반적인 메디컬 서사와 사뭇 다릅니다. 이 작품에서 테라피스트(Therapist)’라는 직종으로 명명되는 이 과정은 생물학적으로 기생하는 종양을 제거하는 외과적 과정과 결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병질로 규정되어 신체적 혹은 육체적으로 해를 끼치는 병리는 기술적인 능력으로 제거해야하는 부류가 마땅하지만,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정신적으로 구조화된 내면의 상흔은 결코 무자비하게 절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이 소설은 병증의 물리적 투쟁보다, 상흔을 인지하고 재구조화하는 포용의 역학에 중점을 둡니다. 어둠을 안는다는 제목처럼, 내면의 병리학적 상태는 억압과 절제의대상이 아니라 결국 수용함으로써 재구조가 필요한 대상임을 주제적으로 피력하고 있는 셈이죠.

 

하지만 내면의 병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무의식 속에 방치하는 것은 판이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작품은 상담치료사 강도현을 중심축에 두고, 그의 곁으로 매듭처럼 엮여 들어가는 두 인물, 이나경임태혼을 선명하게 대조합니다.

 

또 했어? 그거.”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원나잇.”

나경은 대답 없이 물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데. 어떤 남자야?”

몰라. 기억도 안 나. 물건은 엄청 컸어.”

그 남자 이름도 모르지?”

알아. 하지만 유부남이었어. 어차피 사귈 것도 아닌데 뭘.”

 

친구 ‘보라’와의 만남으로 그 인상이 묘사되는 이나경의 인물상은 사회적으로도 도덕적으로 어긋난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관계의 윤리성을 상실한 그녀는 가정이 있는 남자와 하룻밤을 즐기고, 그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감정적 마비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자아의 무력감과 공허를 메우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표면적으로 텍스트를 읽는 독자에게는 서사적 반감을 유발하는 일차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나경씨, 상담하면서 느끼는 건데요.” 그가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아직 많이 어색하신 것 같아요. 상담실이라는 공간이 주는 제약도 있고요,”

(중간생략)

그래서 말인데요.” 임태혼이 부드럽게 웃었다. “혹시 다음 상담 전에 한 번 만나서 좀 더 편하게 이야기 나눠볼 생각 없으세요? 저녁 식사 같은 걸로요. 상담실 밖에서 가볍게

(중간생략)

웃고 있는데 눈이 웃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의사가 환자한테 저녁 식사를 제안하는 게 원래 종종 있는 일인가? 나경은 잘 몰랐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반면에 임태혼은 오히려 사회적인 가면과 내면의 자신을 분리하며 접근하는 데에 익숙합니다. 그것은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과 보여줄 수 없는 제 자신을 구분하고 있다는 암시처럼 다가옵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관계에 치중되어 타인에게 제시되는 제 자신을 창조하는, 생각보다 흔한 인간의 모습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의사와 환자로서 마주하며 목격되는 균열, 이나경의 시점으로 묘사되는 웃고 있는 눈이 웃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라는 균열의 이미지는 마치 품 안에 숨겨둔 송곳이 가죽 밖으로 삐져나온 듯한 불안한 징후로 다가옵니다.

 

임태혼은 차트를 덮었다. 이나경의 눈이 자신의 어머니와 눈이 닮았다는 걸 처음 봤을 때 알았다. 크고 또렷한 눈.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 같으면서도 직시하는 눈.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봤던 눈. 중학교 2학년, 자신에게 재혼한다는 말을 전화로 전하던 그날 이전, 마지막으로 봤던 그 눈.

이나경이 상담을 끊었다. 임태혼을 버린 어머니가 연락을 끊었듯이. 나를 버린 어머니처럼, 이나경 너도 결국 나를 외면하는구나.

 

후에 이나경이 그의 눈을 관찰하며 어둠을 감지했듯이, 임태혼도 이나경의 눈을 관찰하며 자신의 내면에 박힌 상흔을 자각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치유사’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나경과 마찬가지로 ‘환자’에 속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어릴 적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내면의 상흔으로 남아 억압되어 있으며, 그것은 성인이 된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의 눈과 관심으로 표출되며 주변 이성들에게 투영되기에 이릅니다. 명색이 전문 상담의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그가 정작 자신의 병에는 무력하게 휘둘리고 있다는 이 아이러니한 설정은 독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반복 되는 게 있어요. 멈추고 싶은데 멈춰지지 않는 것들이요.”

(중간생략)

남자요. 특정 외형의 남자한테 반복적으로 끌려요. 그게 이상성욕으로 이어져서 호텔 바 같은 곳에 가서 만난 남자와 하룻밤 같이 보내곤 했어요.”

(중간생략)

특정 외형이라는 게 어떤 외형이죠?”

각진 턱선에 부리부리한 눈썹의, 남자답게 생긴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려요.”

(중간생략)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아빤 너무 과묵해서 잘 표현을 하시진 않았지만.

 

이나경도 이런 내면적인 상흔에 대해 분명히 묘사됩니다. 강도현의 도움으로 목소리로나마 꺼내본 이나경의 사정은, 그녀의 반사회적인 행위와 집착의 기저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결핍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다릅니다.

 

아빠가 다치는 줄 알았어요. 근데 아빠는 괜찮은 것 같아요. 눈이 감겨 있어요. 엄마가 아빠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중간생략)

싫었어요. 엄마가. 아빠를 저한테 안 줘서.”

(중간생략)

나경아, 그때 본 건 무서운 게 아니야. 엄마 아빠가 서로 사랑하는 거야. 나경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그 사랑 때문이란다.”

 

그 치유의 과정은 성숙한 육체와 유아적인 정신의 탈피처럼 해석됩니다. 상식적으로 성인이 된 이나경이 어릴 적에 보았던 부모님의 육체적 관계가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충격은 머리로 이해하지 못 하는 원초적인 공포로 내면에 억압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그 원형적 순간으로 진입하여 트라우마를 억압하거나 절제하는 대신, 현재의 주체 안으로 통합을 시도합니다. 이해하지 못해 불안으로 남겨두었던 과거를 비로소 품어 안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이 구조화하는 치유의 알고리즘입니다.

 

저는 그저 짝사랑한 죄밖에 없습니다. 꽃다발 한 번 보낸 게 그렇게 큰 죄인가요? 제발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중간생략)

임태혼 씨, 짝사랑이건 뭐건 간에 상대가 응하지 않으면 폭력이에요. 앞으로 이나경 씨한테 연락하거나 접근하면 스토킹 처벌법으로 실형 받을 수도 있어요. 아시겠습니까?”

(중간생략)

임태혼은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보이는 것에 속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하지만 임태혼은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포옹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어른이 된 지금 그 상흔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이 치유되어야 마땅할 상흔이라는 인식이 무뎌진 상태라고 판단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는 그의 생각은 임태혼이 주변인들에게 뿌리는 냉소에 가깝지만, 사실 이 구절은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조소로도 해석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임태혼 또한 자기 자신을 보고 싶은 방식대로 보고 해석합니다. 그는 유아기의 상흔을 관찰하고 교정하기보다, 내면의 왜곡된 욕망을 정당화하며 고립을 자초합니다.

 

, 이나경. 네 과거라는 게 마음의 병이 있어서 그랬던 거잖아. 이제 그 병이 나았고. 병 고쳐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건데, 그게 문제야? 아니잖아. 그건 진짜 좋아하는 감정이야. 결핍이 아니라.”

(중간생략)

느낌이 다르잖아. 너 예전에 그 남자들 얘기할 때랑 지금 이 사람 얘기할 때 표정이 완전히 달라. 예전엔 공허했고 심드렁했지만 지금은 설레어하고, 쑥스러워하고, 주저주저하고 있잖아. 완전 달라.”

 

반면에 강도현과 만족스러운 만남과 치유를 겪고 세상에 나온 이나경의 모습이야말로 보고 싶은 것만 본다라는 임태혼의 냉소에 반박하는 완벽한 대상입니다. 머릿속으로 막연히 이해하고 있던 사랑에 대한 본질이 정신으로 이해하는 본질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그녀는 진짜 사랑을 이해하기에 이릅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강박적 충동에서 벗어나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 그 선에 발을 거치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것은 그녀가 타인의 시선에 맞춰 고의적으로 재구조화 한 자신이 아닙니다. 자아의 상흔을 포용하며 무의식적으로 재구조화 된, 본연에 가까운 이나경 그 자체입니다.

 

오늘 오전, 탈옥 연쇄살인마 박재현이 경기도 소재의 한 요양원에서 경찰에 검거됐습니다. 박씨는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탈옥한 것이라고 진술했으면(이하생략)”

 

사실 이 작품에서 정신적인 상흔에 관한 키워들 살펴보면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부모의 이미지가 관측되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비록 작중에 언급되는 박재현은 임태혼이라는 다가오는 위협을 안팎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만, 그런 인물조차도 어머니를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탈옥을 감행했다는 것은, 그 또한 내면적으로 임태혼과 이나경과 같은 상흔을 품고 있다는 암시라고 해석됩니다. 즉, 작가 본인이 (반드시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부모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유아기, 성장기의 궤적이 인간의 삶과 정신에 얼마나 결정적인 고비가 되는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봐도 무방합니다.

 

임태혼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한참 동안을 생각했다. 그러다 알았다. 그녀와 만나던 동안 했던 모든 대화를 복기하다가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을 무서워한다는 걸. (중간생략)어머니와 같은 이유였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섭고 싫었던 거였다.

임태혼은 신선한 충격에 움직이지 않고 보라를 봤다, 문자로 이별을 통보하고 자신을 떠난 그녀와 똑같은 크고 또렷한 눈이었다. 이 여자는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 있었다. 오빠라고 부르면서. 뭐지?

 

결국 임태혼은 자신의 상흔을 주체화하지 못한 채 광기 속에 갇히고 맙니다. 이성 관계의 실패와 유아기적 상흔이 맞물려 살인이라는 극단적 범죄로 치닫는 와중에도, 정작 자신을 오빠라 부르는 여성의 반응 하나에 당황하고 주저하며 정신적인 균열을 엿보입니다. 이는 포용의 과정을 거치기 전 이나경이 보여주었던 집착의 모습과 강하게 겹쳐집니다. 그는 무너집니다. 임태혼은 끝내 자신의 어둠을 품어내지 못한 채, 범죄자라는 사회적 배제의 말로를 맞이하게 됩니다.

 

나랑 함께 있어줄 수 있어요? 앞으로 쭉.”

. 그럴게요. 이런 저라도 좋으시다면.”

 

이나경은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한 사람을 선택합니다. 상흔에 찌푸리고 있던 눈을 바로 뜨고 바라본 남자를, 능동적인 의지로 수용하기를 택한 셈입니다. 그녀가 강도현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어둠을 포옹했듯이, 이제 그녀가 상처 입은 누군가를 포용해줄 차례입니다. 그녀는 이제 타인의 상처까지 포용할 수 있는 진정한 성숙에 도달하게 된 셈입니다.

 


 

3.강도현? 독자들은 그에 대해 알고 싶답니다.

 

앞선 분석에서 이나경임태혼이라는 두 환자의 내면적 궤적과 비극을 입체적으로 다루었음에도, 치료의 주체인 테라피스트 강도현에 대한 논의가 유예되었던 점은 비평적으로 사뭇 의아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강도현이라는 인물은 서사를 주체적으로 보여주는 입체적 캐릭터라기보다, 치유의 도구이자 서사적 해결사로서의 기능에 머무는 기술적 인상이 훨씬 강하게 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설의 층위를 유심히 파헤쳐보면 강도현은 단지 해결사라는 위치에서 제 역할에 충실할 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 자명합니다. 당장 이 인물에게 부여되어 있는 서사적 역할만 해도 삼중의 방향이 관측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다수의 환자를 구제하는 초월적 매개체

둘째, 임태혼이라는 병리적 치료자와 대비되는 이상적 테라피스트의 원형

셋째, 이나경의 내면적 치유에 대한 서사적 보상이자 구원자

 

여기서 임태혼과 대비되는 테라피스트의 모습은 흔적기관처럼 막연한 감각으로만 다가옵니다. 사건 면에서 그는 이나경이 강도현을 찾아가는 시발점과 같은 역할로 첫 인상을 끊습니다. 이나경은 임태혼과의 상담에서 불안을 느끼고, 적어도 더 나은 치료를 위해 능력 면에서 검증 되었다는 강도현을 찾아가게 되었죠. 물론 이나경이 임태혼을 거부한 일차적 원인은 으로 대표되는 위협적인 징후 때문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의 임상적 역량에 대한 신뢰 결여가 원인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편입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독자가 두 상담의의 역량을 비교하고 분석할 만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도 임태혼의 상담 프로세스는 과감히 생략된 채, 환자에게 사적 만남을 강요하는 도덕적 결함으로만 묘사되며 단면적으로 소모되는 면이 있습니다. 이나경이 강도현에게 이행하는 정당한 계기가 되기에는 서사의 개연성이 다소 느슨하게 엮여 있는 셈이죠.

 

그렇다면 작중에서 공인된 이상적 치료자 강도현의 전문성은 과연 독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설득력을 획득하고 있을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작품은 도입부부터 성폭행 트라우마를 겪는 인물과의 상담 장면을 배치하며 그의 탁월한 치유 능력을 강조합니다. 이 과정에서는 독자는 전문적인 상담학 지식이 배제된 채로, 오로지 텍스트가 제공하는 임상 묘사를 통해 작품의 설득력을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당연하지만 모든 독자들이 상담치료라는 분야에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소설 내에 있는 정보를 통해 그 현실성을 감지하고 납득하는 것이 전부이죠. 다시 말하자면, 강도현이 작중에서 보여주는 최면을 비롯한 치료 과정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통용되는가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 무척 제한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독자 입장에서는 강도현의 모습이 얼마나 능통한 치유사로 느껴지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볼 수밖에 없습니다. 도입부에 성폭행으로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인물을 상담해주는 장면을 몇 구절 발췌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최면 치료를 해볼게요. 무의식 안에 있는 기억,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방식이에요.”

(중간생략)

교회 수련회에서 2살 많은 교회 오빠로부터 강간을 당했다. 그 교회 오빠가 최아린의 팬티를 벗기고 삽입을 하려던 그때, 그는 최아린의 음부의 애액을 손가락에 찍으며 웃었다.

(중간생략)

당신의 몸은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윤활 작용을 한 거예요. 그게 전부예요. 그 반응은 당신을 설명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당신은 당신의 몸이 아닙니다. 몸은 몸일 뿐이에요.”

 

이 성폭행 장면은, 마치 성인만화에서 볼 법한 자극적이고 직설적인 묘사로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트라우마에 대한 강도현의 개입이 지극히 과학적이며 생리학적인 해명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극에 반응하는 생체 기전을 설명하는 그의 언어는, 깊은 내면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심리치료라기보다는 지식적 권위에 기반한 계몽적 성교육의 인상을 풍깁니다. 통념을 깨는 해법이라는 의도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무형의 내면을 다루는 정신분석 전문의로서 기대되는 수용적 치유라기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지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선혜인님과 남편 윤도성님은 전생에도 부부였어요. 윤도성님은 전생에도 스님이셨고, 환속하여 서혜인님과 부부의 연을 맺었지요. 하지만 명색만 부부였지 부부생활은 순탄하지 못했죠. 선혜인님은 전생에도 거의 독수공방을 하셨어요. 그 원이 남아 이번 생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중간생략)

죄의식으로부터 성욕을 해방시키셔야 합니다. 자위는 적어도 20분 동안 하셔야 하고, 소리는 마음껏 지르셔도 됩니다.”

(중간생략)

문이 열리자, 안에선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내의 교성이었다.

(중간생략)

아내는 진동기구를 손에 쥔 채 엉덩이를 들썩이며 신음을 내고 있었다. 교성의 정체는 아내의 자위하는 소리였다. 도성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저게 아내의 마음이었구나. 눌러왔던 욕망이었구나.

 

뒤로 단락을 두고 이어지는 두 번째 상담은 오히려 전생과 같은 초현실적인 가정을 두며 환자들을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에 따른 해결책으로 아내에게 자위기구를 주고, 남편에게 관음하게 만드는, 정서적으로 선뜻 납득하기 힘든 행위를 제시합니다. 작중에서도 해당 과정에 의문을 품는 남편의 서술을 보여주지만, 곧바로 성욕을 감지하며 아내와 거리를 좁히는 이 과정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한 충격 요법에 가깝게 느껴지는 탓에 독자에 따라 치유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어려운 지점일지도 모릅니다. 즉, 이런 반감들은 이 임상적 묘사가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의 신뢰를 넘어, 직종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신뢰를 주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지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강도현은 혼자 상담실에 남았다. 창밖으로 삼청동이 내려다보였다. 이 시간은 늘 조용했다. 누군가의 깊은 상처를 건드리고 난 뒤 남는 고요함이었다. 강도현의 마음에 인간에 대한 연민이 올라왔다 다시 가라앉았다. 강도현은 늘 그 연민을 억누르지도, 붙들지도 않고 그냥 두었다. 오랜 수행 끝에 생긴 습관이었다. 그는 수다원을 거쳐 사다함, 아나함향까지 도달한, 성자의 과위를 증득한 수행자였다.

 

물론 작중에서도 강도현의 배경을 서술하며, 그가 세속적인 상담의와는 다른 독특한 경험으로 지식과 능력을 습득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상담치료학의 매커니즘과는 결이 다른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입니다. 즉, 독자 입장에서 강도현이라는 인물을 기술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작적인 영역의 개연성이 동반됩니다. 단순히 비범한 능력자라는 이유로 모든 치료 과정에서 관측되는 비현실성을 납득하기에는, 그가 애용하는 치료 기법들이 최면이나 자극적 행위 지시 같은 대중적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기에, 정작 인물의 독창적 개연성은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나경 씨 마음 봤어요. 처음부터. 그게 전부예요.”

(중간생략)

아나함과로 가는 길은 잠시 미뤄두자. 강을 건너는 건 다음 생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여자 곁에 있는 건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다.

 

이나경과 맺어지는 결말은 강도현 또한 제한된 삶 속에서 애정을 갈구하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치 그 과정은 선물 상자처럼 이나경에게 주어집니다. 이나경이 자신의 상흔을 다스려준 이에게 직접적인 호감을 느꼈다는 배경은 당위성이 충분하지만, 강도현 입장에서는 이나경은 그를 거쳐 갔던 수많은 환자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물론 현실에서 인간이 주고받는 호감이란 그 인과를 거치지 않습니다. 단순히 첫눈에 반했다는 수식어도 충분히 통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인과로 묶여 있는 서사 면에서 강도현이 이나경에게 느낄 수 있는 호감은 조직되지 않은 로맨스처럼 느껴지는 것이 일차적 인상입니다.

 

독자 입장에서 강도현에 대해 이해하고자 노력해도 그에 대한 정보 자체가 무척이나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쩌면 은밀한 취미나 성도착증 같은 표면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기호들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보니, 독자들에게 관측되는 강도현이란 평판이 좋은 상담의라는 컨셉적인 면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도현이라는 인물이 소설 내에서 행하는 영향력과 비중을 고려한다면, 서사의 중심을 관통하는 그의 역할 면에서 한 번 고민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4.어둠을 품어내야 한다는 그 고찰에 감사하며.

 

제목에서 다루는 어둠이란 무형(無形)이자 무취(無臭)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때로는 그 짙은 농도와 색감만으로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내면의 병리 현상과 궤를 같이합니다. 통념적으로 우리 사회는 어둠을 대항 불가능한 무력함의 상징으로 여겨 외면하려 하거나, 혹은 기술적으로 반드시 극복하고 잘라내야 할 시련의 대상으로만 간주하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당신의 어둠을 안아요>가 보여준 시선은 인간에게 필요한 온기를 바탕으로 한 깊은 고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둠을 억압하거나 배제하기보다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포용할 때 비로소 진정한 주체적 성숙이 이루어진다는 인간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동시에 그 포용의 과정을 홀로 감당해 내지 못해 무너지고 마는 인간의 본질적인 나약함과 결핍 역시 날카롭게 짚어내고 있죠. 어쩌면 강도현이라는 인물은 그 나약함의 가장자리에 서서, 상처 입은 주체가 어둠을 품어 안을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는 구세주이자 동행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간사회에서 지켜내야 할 온기를 형상화한 한 사람일지도 모르죠.

 

비록 비평적 관점에서 개연성이나 인물 조형 면에서 아쉬움을 언급하긴 했지만, 이 소설이 독자에게 안겨준 주제적 울림까지 빛 바래는 것은 아닙니다. 상흔으로 얼룩진 현대인의 내면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이를 포용과 관계라는 따뜻한 서사로 풀어내려 한 작가님의 대담하고도 섬세한 시선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이 펼쳐내실 다채로운 인간 탐구의 서사들을 마음 깊이 응원하며, 부족한 감평문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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