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게임, 구체적으론 배틀 그라운드에 접속한 캐릭터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게임 인터페이스는 지금보다 훨씬 정교하고요. 컨트롤러를 조작하는 유저가 아니라 두 발로 전장을 누비는 플레이어의 시점을 택함으로써 얻게 되는 현장감이 강력한 장점으로 기능합니다.
시작이 인상적입니다. 첫 문장에서부터 강하게 풍겨오는 세기말의 음울한 뉘앙스는 점차 드러나는 진짜 세계관에 금세 무게감을 잃고 자리를 내어주게 되지요. 그 전환의 과정이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이질감이 들었습니다. 위태로워 보였던 풍경이 알고 보면 완벽하게 안전한 세계의 일부였다는 데에서 찾아오는 역설적인 느낌 같은 거죠. 비슷한 소재가 서술 트릭 버전으로 쓰여도 꽤 재미있을 것 같네요.
게임의 형식은 배틀 로얄이고, 게임의 목적은 끝까지 살아남는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곳곳에 배치된 무기와 탄약, 차량과 소모품을 획득하고 전략을 세워서 다른 플레이어를 죽여야 합니다. 방대한 전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좁혀지고,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은 그 좁아지는 영역 안에서 승부를 가려야 합니다. 익숙한 게임의 윤곽이 드러나는 설정이죠.
주인공 ‘나’는 팀메이트와 함께 2인 팀전 부문에 초청받아 예선전을 치르기 위해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팀메이트는 연습 첫날부터 일이 생겼다며 자신의 아바타를 대신 보내지요. 아바타는 해당 사용자의 플레이 성향을 정밀하게 반영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함께 연습하기 위한 파트너로 별 손색이 없고, ‘나’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어느 순간 화가 나서 팀메이트의 아바타를 죽이러 가지요. 아바타의 플레이는 어차피 ‘나’의 예측 범위 안에 있을 테니 마음만 먹는다면 그를 죽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나’는 아바타가 호텔 4층에 몸을 숨기고 있을 거라 예상하고 그쪽으로 이동합니다.
작품의 매력은 둘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작가가 소재를 다루는 기술이 매우 능숙하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소 작가가 좋아하고 잘 아는 소재를 가지고 놀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직접 플레이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구체적인 긴장감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도입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바로 뒤에 이어질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죠.
다른 하나는 이것이 게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간간이 현실을 비트는 여유와 익살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읽는 중에는 너무 천연덕스럽게 치고 빠져서 왔다 갔는지도 모르지만, 이야기를 다 읽고 났을 때 기억에 박히는 문장은 의외로 게임 안이 아니라 게임 밖을 묘사하고 있죠. 예컨대 이런 것들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예측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되는 일이 아니면 좀처럼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이곳에 존재하는 척 하는 모든 것들은 풍선껌 맛 담배처럼 헛되고 허황될 따름이다.
본질적으로 무용한 것. 즉, 게임은 유희다. (……)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킹을 노리고 반 집 앞서려 기를 쓰고 서로를 향해 총질을 한다. 왜?
그곳에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의 모조품과 한 팀이 되기 위해 접속하지 않았다.
실제로 게임을 하면서 내내 이런 생각만 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그럼에도 이 문장들은 게임에 푹 빠진 주인공에게서 발화되었을 때에 비로소 특별한 의미를 띠게 됩니다. 결국 ‘나’가 아바타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그가 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아무리 정교한 모조품이라고 해도 넘볼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이건 게임이고, 본디 게임이란 즐거우면 장땡 아니겠어요.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저에게 한 편의 게임과도 같은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