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뚱그려서 팬픽이라고는 합니다만, 사실 이거 상당한 함의가 있는 행위가 아닐까요? 왜냐하면 대상이 음악이거든요. 아이돌이나 애니메이션 팬픽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가져올 등장인물이 있는 것도 아닌 음악 자체를 대상으로 팬픽을 쓴 것이 재밌는 시도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스토리가 Excalibur의 가사에서 모티브를 따오긴 했지만, 그 확장된 결과물을 보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아직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에게 미리 알려드리자면 이 작품은 일본의 인디밴드 Mili의 곡인 Imagined Flight, Cerebrite, Space Colony, 그리고 Excalibur와 깊은 관련… 이 있기도 하지만, 그냥 잘 어울립니다. 들으면서 읽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작가님이 왜 이 곡목들을 1화에 전부 다 안 써놓으셨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스포일러는 이미 예견되어 있습니다.
지구가 아파서 인류는 커맨드센터를 띄우려고 합니다. 배은망덕한 놈들, 이게 다 누구때문인데.
친구가 요즘 웹소설은 로판이 잘 나간다길래 로판이 뭐냐, 하이판타지에 대항하는 로우판타지냐고 물어보니 로맨스 판타지라고 하더군요. 이 무슨 역전앞이나 외갓집 같은 소립니까. 로맨스가 곧 판타지이거늘. 이 작품도 1화부터 뭔가 불안불안 하더라니 뭐? 침대로 들어와? 처음엔 내가 뭘 잘못 읽었나 싶었는데 나중에는 아주 대놓고 방으로 부르네요. 제목의 엑스칼리버가 그 엑스칼리버였나 하고 심란한 마음에 한동안 방안을 서성거렸습니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인류의 구원을 위한 ‘방주’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을 진두지휘하는 선배는 탈인간급의 능력자이며 화자인 주인공은 그런 그녀와 대놓고 그렇고 그런 사이입니다. 선배는 이런 화자를 유닛 리더로 승진시키고 심지어 둘이 결혼까지 하는데, 이런 정실인사로 얼룩진 프로젝트가 한방에 성공하는 것은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졸지에 홀아비가 됩니다. 인류의 존망을 건 프로젝트가 그렇게 박살나고, 저 하늘의 별이 된 아내의 유언에 따라 일기장을 훔쳐본 주인공은 사실 아내가 미래를 보는 에스퍼였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예정된 성공의 끝에서 주인공은 인간을 반쯤 그만두고 우주공간을 떠돌지만 그렇다고 생각하기를 멈추지는 않습니다.
주인공과 선배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이름이 있는 등장인물이 없습니다. 이름 짓기의 심각한 귀찮음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이점이 많은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건 이야기의 규모가 일정 이하로 작을 때만 시도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인물들이 서로를 부를 때 직업박람회나 지구촌 한마음 축제 비슷하게 되어버리더라구요. 여기서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이야기는 규모가 작습니다. 분량만 봐도 연재작 치고 딱히 많은 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규모에 비해서 다뤄야 하는 소재들은 큽니다. 인류의 존망이 걸린 이주프로젝트와 결정론적 세계관의 아카식 레코드가 대학선배와의 사랑을 싣고 제2우주속도를 뛰어넘어 솟구쳐올라야 하거든요. 그래서 읽으면서 좀 버겁다 싶은 구간이 사실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걸 또 어떻게든 용인가능한 수준까지 소화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배가 사실 아카식레코드에 접속해서 미래를 예지한 것이라는 점이 총 9화중 7화에 가서 튀어나오는데, 선배의 살벌한 업무능력과 초단위 시간감지능력이 앞에 묘사되어있기 때문에 또 아주 뜬금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좀 더 직접적으로 죽기 싫다고 하는 장면도 있구요. 전지구규모의 프로젝트 치고는 조직구조가 기묘하게 단출하고 건조하는 방주의 크기도 짐작이 가지 않지만, 이런 중대한 미션에 필요한 물건을 스크랩에서 긁어와야 할 정도로 인류문명이 맛이 간 상태라고 보면 또 용인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이런 소재들을 장착하기 위한 프레임은 갖춰져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게 어떤 느낌이냐 하면,
기억하실 분은 기억하시겠지만 한 2000년대 초반까지는 스토리 있는 뮤직비디오가 대세였습니다. 특히 발라드 장르에서 성행했는데요, 당연히 풀사이즈의 영화는 아니지만 의외로 또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여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려서 죽고, 남주인공이 납치된 여주인공을 구하다가 죽고 심지어 남주인공이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죽고 아무튼 시간은 몇 분짜린데 기본적으로 사람 한두명은 죽어나가는게 보통이고, 그 스케일도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 유명한, 노래방에서 나오면 끝까지 보게 되는 임창정이 주차관리하는 뮤직비디오도 이 시기 작품일겁니다 아마.
음악 팬픽을 쓰셨다고 막 갖다붙이는 게 아니라, 이 작품은 정말 뮤직비디오를 본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첫번째 시도 실패에서 대체 몇 명이 죽은 것일까, 만약에 선배가 성공했다면 혼자 엑스칼리버타고 날아오른 선배랑 주인공은 다시 만날 수 있는걸까 등등의 의문이 남지만 그걸 멋진 이미지들과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인 울림으로 눌러버리고 끝까지 간 끝에 다 읽고 나서는 아, 이런 것도 괜찮네 하는 느낌으로 어깨 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날아오르는 티타늄 엑스칼리버와 추락하는 방주 등의 이미지를 관철한다면, 오히려 더 설명을 생략해버린 서정적인 이야기로 구성할 수도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그랬다간 이 작품과는 다른 무언가가 되었겠지요.
어떤 작품이 완성도가 높고 낮고를 떠나서, 정말 ‘쓰고 싶어서’ 쓰여진 작품을 만나는 것은 의외로 드문 일입니다. 물론 창작이라는 게 그런 욕망의 불꽃에서 출발하는 게 당연하긴 한데, 시간이 흐르다 보면 무슨 베어그릴스 아저씨 모닥불 피우는 것처럼 불똥을 후후 불어가면서 의욕을 긁어모으곤 하죠. 이 작품을 읽을 때는 이런 등장인물이, 이런 장면이 좋아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아서 어쩐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렸을 때 에펠탑의 검은 고양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음악가 에리크 사티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덕분에 짐노페디(여기저기 나오는 곡이긴 한데, 공효진 주연의 스릴러 도어락에도 나옵니다. 왜지?)와 Je te veux(이거 어떻게 발음하는지 누가 좀 가르쳐 주십쇼)를 20년 넘게 듣고 있지요. 그 책을 안 읽었다면 글쎄요,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에리크 사티가 나올 일은 없을테니 저의 금붕어 똥만한 클래식 저변은 더욱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비슷한 경로로 이렇게 영업을 당하네요.
일본의 인디밴드 하니 문득 슬픈 경험이 생각나는데, 올해 초에 로판 보는 친구에게 아마자라시를 들려줬더니 너… 이런 거 듣니? 하는 눈으로 쳐다보더군요. Mili는 친구한테 말 안하고 혼자 들으렵니다. 계속 듣다 보면 저도 뭔가 쓰게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