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는 보통 일상 세계에 속한 인물이 비일상의 경계를 접하면서 겪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이 경계가 무너지면서 발생하는 비극이 주요한 내러티브가 됩니다. 경계가 흐릿해진 비일상은 이내 일상을 침윤하며 붕괴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침윤 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인간의 욕망에 독자들은 이입하게 되고, 이 파멸에 배반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됩니다.
배상민 작가는 국내 호러, 아직은 가능성의 장르라는 비평에서 호러란 인간 욕망의 비극성을 다루는 장르라고 볼 수 있다, 라고 지적했습니다. ‘호러 장르에 등장하는 이러한 욕망은 그것을 욕망하는 주체가 심령체이건 인간이건 관계없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면서요. 이는 결국 충족될 수 없는, 가능성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핍과 부족의 인지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가능성 속에서 비극은 발아합니다.
이 소설의 일상은 철저히 유리된 주인공의 세계가 균열을 일으키고, 봉합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그 과정은 실로 기묘한데, 초점이 주인공의 시선으로만 이뤄져 있기 때문에 비일상의 근거를 주인공에게서는 찾아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것이 비일상이 일상처럼 묘사되는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균열의 직시가 타인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한기주라는 캐릭터의 묘사를 보면 상당히 기묘합니다. 주인공이 먹는 밥에서 썩은 내가 난다면 나는 것이지만, 그 것을 아주 잘 안다는 식으로 자신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정육점 주인과 만났다는 설명은 어딘지 기분을 찜찜하게 만듭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요.
선악과는 앎의 열매입니다. 뱀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일어날 결과를 예상했을까요. 끝내 뱀은 가장 비천한 짐승이 됩니다. 만일 선악과를 먹고 일어날 파국을 알았다면 뱀은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으라 권했을까요? 그리고 어떤 마음에 의하여 이브에게 선악과를 권했을까요. 하지만 뱀은 이 선악과의 달콤함을 알기에, 이브에게 선악과를 권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것이 금단의 열매인 것을 알고서도 먹이려고 들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뱀은 알레고리적으로 다양한 서술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한기주의 역할이 뱀의 역할과 같다는 점에서 한기주의 무고함은 어딘지 빛바래 보입니다. 시체 썩는 냄새를 한기주는 어떻게 잘 알고 있었을까요. 특히 왜 인간의 시체 썩는 냄새를 그렇게나 섬세하게 감각하고 있었다는 걸까요.
그렇게 선악과를 먹은 주인공은 자신이 살던 세계가 비일상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비일상의 세계는 살인과 시체 훼손을 토대로 세워진 비윤리적인 세계입니다. 동시에 이 비윤리적인 비일상이 자신의 일상임을 직면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리라는 직감에 사로잡히며, 선과 악이 없는 태초의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한기주가 자신에게 준 초콜렛을 모조리 게워냅니다. 하지만 이미 선악을 알아버린 자신과 선악을 모르는 자신은 결코 같지 않을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결핍의 키워드는 먹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에서 주인공은은 어머니에 의해 ‘일반적인 먹을 것’을 금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일반인처럼 먹는 것을 꿈꾸면서 금기의 안쪽에서 연명하며 살아갑니다. 그 것이 진짜 초콜렛이라는 달콤함을 느낀 후 진실을 깨닫고 이 결핍의 원인 -즉 아버지의 시체-을 직시합니다. 이 소설의 파멸은 비일상의 침윤 속에서도 윤리와 사람다움을 포기하는 주인공의 선택에 있습니다.
이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은 비인도적인 살인과 시체 훼손 속에서도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자하는 주인공의 스스로에 대한 포기입니다. 그리고 결핍으로 인한 인간성의 붕괴이자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을 깨닫는 – 비극이기도 합니다. 그 것이 생존에 대한 열망이기에, 가장 인간답지 않은 선택은 역설적으로 인간적이 됩니다. 결코 성취될 수 없는 스스로의 결핍의 말로는 삐뚫어진 스스로의 포기라는 결말로 이뤄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