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리뷰는 1~37까지만 읽고 쓴 감상임을 먼저 밝힙니다.
사람들이 판타지를 선호하는 이유는 현실의 골치아픔을 잠시나마 망각하거나 도피하기 위해서라고 들은 적 있습니다. 사실 여부를 논하는 것은 차치하고, 그 말대로라면 소설 속 주인공에 이입된 동안만큼은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행복한 성공이나 삶, 행복으로 열매 맺는 과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독자는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읽기를 통해 성장과 함께 희망의 기운을 훔쳐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녹차백만잔 님의 판타지는 그런 상식을 허뭅니다. 그의 판타지 세계는 끝없이 좌절을 매 회마다 준비해두었다가 거듭되는 회차만큼 쌓아올리는 게임 같습니다. 인간이든 마법사든 등장인물이 판타지 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이 현실 세계의 논리를 따라 움직이기 떄문입니다.
허무개그처럼 끝나는 결말이 있는가 하면 자본주의의 현대사회의 핵심을 간파하는 회차도 있습니다.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의 장르간 법칙 따윈 없습니다. 작가는 유쾌하고 발랄하게 단숨에 그 벽과 경계를 무너뜨립니다. 어쩌면 작가님 본인이 판타지 속 주인공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이도 보입니다. 소설의 매체를 빌려서요.
쉽게 소비할 수 있고 분량도 길지 않아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지도 않습니다. 빠르고 간편한 것을 선호하는 현대 사회가 원하는 콘텐츠에 적절하게 부합합니다. 물론 만들어낸 창작물이 그렇다고 창작 과정조차 간단하고 쉬웠을 거란 착각은 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걸 쉽게 만들어내 보이는 게 프로가 추구하는 방향일 테니까요.
생각을 조금 비틀어 확장시키면, 요즘 뜨고 있는 메타버스의 개념을 떠올리게 하고 이해하게 해주는 구조입니다. 메타버스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웹상에서 아바타를 이용하여 사회, 경제, 문화적 활동을 하는 따위처럼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이르는 말]. 물론 정확하게는 3차원 가상세계를 일컫는 용어지만 저는 이 용어를 ‘현실 세계의 확장판’이란 의미에서 가져왔습니다.
녹차백만잔 님의 ‘멍청한 판타지 모음집’은 판타지 세계를 현실 세계로 소환하여 구성 인물이나 배경은 분명 판타지스럽지만 주제만큼은 드러내놓고 현실을 패러디하고 있다는 게 1~37편까지를 읽고 느낀 소견입니다.
지하철에서 내릴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용에 대한 충분한 생각은 300편까지 읽어야 나올 것 같습니다. 오늘 지하철 타서 멍때리는 대신 그 짧은 시간에도 읽기 좋고 맘 먹고 정주행해도 좋을 소설의 하나를 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