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나이가 아주 많지만 자라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고, 숭고한 사람들의 피를 마시고 자라지만 누구도 그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 나무의 이름은 민주주의입니다.
피를 마시는 나무답게, 민주주의를 꽃 피우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필요합니다. 당장 미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났고, 프랑스에서는 수차례 혁명이 일어나고 실패하기도 하며 젊은이와 투쟁가, 야망가들이 목숨을 바쳐야 했죠.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영국의 명예혁명조차 그 이름이 무색하게 혁명 진행 중 크고 작은 교전이 벌어졌고, 혁명이 마친 뒤에는 유럽 대륙의 전쟁에 휘말려 엄청난 피를 쏟아야 했습니다.
그 피를 마시는 나무의 씨앗은 우리나라에도 도달하게 됩니다. 공화국이 세워졌고, 그것을 독재정이 짓눌렀으며,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무수한 피가 흘렀습니다. 1987년, 처음으로 시민이 선택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고, 1992년 처음으로 군인이 아닌 시민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시민을 할퀴어 피를 내고 그 피로 고랑을 뒤덮어 키운 작물로 자기 배를 불린 독재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합당한 역사의 처벌을 받았을까요? 슬프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독재자들은 여전히 으리으리한 집에서 부정하게 축적한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호위호식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자신은 그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독재자 청산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친일 부역자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정권을 잡아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던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발전했으나 동시에 정체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런 우리의 과거와 너무나도 닮은 나라와 독재자가 이 소설에서는 등장합니다.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원을 불법적으로 체포하여 부당한 권력을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의원들도 등장합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민주화 의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은 계엄령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역시 독재자의 탄압을 받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런 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어느 특별한 의원이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의원이자,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그가 의회에 참석해야 계엄령을 저지하고 독재를 멈출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그 주인공이 독재자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의회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모험담입니다.
이 소설은 너무도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유쾌한 활극입니다. 분명히 짜임새 있는 정치극은 아니고, 민중의 저항을 주제로 하는 민중 소설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사건의 발생은 우연적임에 그치고, 그런 우연이 겹치고 겹쳐 주인공을 돕는 형태로 매듭지어집니다.
이렇게 가볍게 볼 수 있는 모험담을 진지하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이 소설이 우리가 갖지 못했던,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대신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독재자가 계엄령을 선포할 때 이를 저지할 충분한 수의 저항세력이 일지 않았고, 권력을 찬탈하려는 반란군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들의 사전 공작에 의해 충분한 대처를 하지 못했습니다. 계엄을 저지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고, 시민들은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작위적인 사건의 연속을 보며 실소하는 대신, 우리는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큰 차이는, 독재자의 최후입니다. 소설 속 독재자는 권력을 잃은 즉시 체포되었고, 곧바로 사형당하였습니다. 계엄에 관련한 자들은 모두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았고, 저항하는데 기여한 자들은 그 공을 치하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어떠했는지 떠올려야 할 차례입니다.
그런 생각을 이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군더더기 없는 해피엔딩이지만 동시에 한없이 씁쓸한 결말을 곱씹어보게 됩니다. 그 어떤 얼룩도 없이 말끔한 결말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유쾌한 활극의 끝맺음으로서는 더없이 적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은 현실,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소설과 역사를 비교해보며 마냥 웃으며 넘길 수만은 없는 감정이 가슴 속에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감정의 이름은 여운입니다.
한국인을 위한 동화와도 같은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