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따른 인간의 신분제가 확립된 가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오랜 전쟁을 통해 세 개의 지구로 나뉘어진 세상은 표먼적으로는 질서를 찾았습니다. 고도의 기술과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L지구와 세계의 질서와 시스템을 관리하는 M지구, 그리고 도태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쫓겨나는 N지구가 있습니다.
주인공 바랄은 M지구의 서민층에 속하는 청년입니다. 철 들기전 사람의 재능을 측정하여 미래의 삶을 정해놓는 사회에서 큰 두각을 못 나타낸 바랄은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려 하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해 귀가하다가 주변의 공간과 함께 다리가 절단되는 황당한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고도로 발전된 자신들의 세상에서조차 흔치않은 일을 당한 그는 똘똘한 친구 월리와 함께 탐정 놀음을 해보기로 결심합니다. 아무런 단서도 목격자도 없는 상황에서 바랄은 자신의 다리를 되찾고 불가사의한 사건을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소설 ‘공간도둑’은 우리가 사는 공간의 일부를 훔친다는 재미있는 설정을 가지고 출발한 소설입니다.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니 판타지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의 구성은 범죄 스릴러물에 가깝습니다. 주인공과 그의 충직한 친구는 사건을 쫓다가 납치되기도 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면서 자신들이 접근도 할 수 없었던 세상에 접근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설국 열차’나 맷 데이먼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엘리시움’이 떠오르는데,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우리의 현실이라는 위기 의식때문에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들입니다.
현대 사회의 신분제는 재력과 기술력으로 결정되지요. 더 많은 기술과 재력이 한 곳에 집중될 수 밖에 없는 미래에는 극복이 불가능한 격차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 벌이는 범죄를 힘 없는 자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들이 스스로를 벌하는 고도의 윤리 의식이나 사법 시스템을 과연 갖출 수 있는 건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궁금해졌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그런 고찰까지는 다뤄지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지만, 다가올 미래에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니 가볍게 느껴지지 않더군요. 작가님이 범죄물보다는 SF 판타지를 염두에 두신 듯, 사건의 진행이나 디테일에 있어서 어둡고 폭력적인 표현을 피하시려고 신경쓰신 모습이 보입니다. 이미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진 하드고어 마초인 제겐 약간 간이 약하긴 했습니다.
소설에 대한 느낌은 복잡한 SF나 판타지를 읽기 부담스러운 독자를 위한 SF판 소피의 세계 같았습니다. 글의 진행은 명쾌하고 등장인물 또한 성격이 분명합니다. 고구마를 삼키는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고 글을 억지로 늘이는 부분도 없으니 가독성이 좋은 SF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눈길을 확 잡아끄는 어떤 핵심적인 이벤트가 없어서 이야기가 조금 평이하게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납치를 두 번이나 당했는데 긴장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던가 하는 부분은 개인적인 감상이라 다른 독자분들의 생각도 굼금하구요. (요즘 어둡고 거친 작품을 읽다보니 생긴 개인적 취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SF 소설은 세계관을 만드는 것부터 많은 시간과 고민을 넣어야 하는 장르다 보니 작가님이 만드신 세계관을 공유하는 재미가 상당합니다. 브릿G의 독자분들도 향초인형 작가님이 창조하신 근미래의 세계를 함께 둘러보시면 어떨까 싶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