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나는 바다를 보러 간다.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갑갑했던 심정이 조금은 내려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사실상 해결된 일은 없어도 망망대해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름 위안이 된다.
민욱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태종대를 찾는다. 자기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해 일찍 공무원 시험에 붙은 친구를 보고 마음이 심란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되는 거 아냐? 공무원 4년 낙방, 부모님 지원 중단, 30세, 구직 안됨, 계약직, 결혼 못함, 해고, 40대, 부산역? 그럴 리가.
라는 민욱의 독백에는 그가 지닌 참담함, 비참함, 갑갑함, 불안, 공포가 그대로 서려 있다.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공포와 그대로 일치해서 민욱이 태종대 자살바위 위에 서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을 때, 그 심정이 무엇인지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게 삶이라지만 솔직히 빛도 못보고 그저 그런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냔 말이다. 콱 죽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오랫동안 스스로 돈벌이를 하지 못한다면, 사람의 자존감은 끝도 없이 추락한다. 그리고 점점 움츠러드는 것과 동시에 각종 부정적인 생각이 사고에 스며든다. 내가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밥만 축내는 식충이는 아닌가, 부모님 등골만 쪽쪽 빨아먹는 등골 브레이커는 아닌가. 부모님이 괜찮다고는 하지만, 이대로 나이만 먹으면? 그 이후에는?
이대로 사회에서 도태될 것 같은 불안함과 공포는 진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암울한 생각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엄습해오고, 그러면 순간 이렇게 살 바에야 확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나 싶은 생각도 문뜩 머리 한구석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서 민욱이 속삭임에 이끌려 홀린 듯 바위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떼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우면서도 내심으로는 공감했다. 나같아도 저렇게 우울할 때 한 걸음만 내딛으면 편해질 수 있다는 속삭임에 홀릴 것 같거든.
그 순간, 학창시절 썸을 탔던 혜빈에게 전화가 오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혜빈은 민욱에게 있어 과거의 미련이자 현재의 욕망이다.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민욱은 속삭임에서 벗어나 귀가하려 하지만, 이제는 태종대가 민욱을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정확하게는 태종대에 있는 정체모를 무언가들이. 그것들은 민욱을 유혹하고 민욱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던 두려움의 대상을 꺼내 보여줌으로써 민욱을 정신적으로 괴롭힌다.
기억 저편에 묻혀 잊고 있었던 공포의 대상이 갑자기 눈 앞에 등장해 자신을 해치려 들면 누구나 패닉에 빠질 것이다. 특히 초자연현상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 공포감은 배가 되지 않을까. 민욱도 과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선임 이정우가 자기를 죽이려 달려드는 것을 보고 공포심에 휩싸인다. 죽으려 할 때가 언제였냐는 듯, 민욱은 살기 위해 도망친다. 출구가 사라진 태종대를 배회하며 도피(?) 생활을 하던 민욱은 ‘영석이 형’ 도 만나게 되고 은신처도 만들면서 그나마 피폐해진 마음을 달랜다. 혜빈에게 오는 연락 또한 민욱을 붙잡아 두는 원동력이다.
무기력하게 도망만 다니던 민욱은 어느 땐가 영석이 형과 함께 허기를 달래며 이런 생각을 한다.
오늘따라 바다 위의 하늘은 안개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수평선 위의 하늘과 구름이 진홍색과, 연보라색으로 번져갔다. 눈에서 눈물이 났다. 너무 분했다. 이런 아름다운 장면을 이런 곳에 갇혀서 보다니, 저렇게 세상은 맑고 아름다운데 내 꼴은 지저분했고 걸레보다 더 너덜너덜했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지금이라는 시간이 하늘에 떠다니는 보잘 것 없는 과자봉지 같았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그런 의미 없는 인생.
몇 번 반격도 해보지만 반격을 해보았자 똑같은 상황-과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인물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에 놓이자 민욱은 점점 지쳐간다.
내겐 내일이 있겠지만 그 내일은 뭔가를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이 아니었다. 어디론가 갈 수도 없고 무언가를 이룰 수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가 똑같은 삶, 무언가에 쫓기다가 지쳐 잠이 들고 그러기를 반복하는 것. 그게 나의 내일이었고 끝나지 않을 뫼비우스의 띠 같았다.
이 독백에서 민욱이 얼마나 지쳐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마냥 태종대에 갇힌 상황뿐만 아니라, 기약없는 공무원 수험 생활에 대한 생각 또한 기저에 깔려있는 것으로 보였다. 귀신에게 쫓겨다니고 출구 없는 태종대를 무기력하게 배회하는 삶. 비좁은 학원으로 등원해 기약 없는 수험 공부만 하는 삶. 비슷해 보이지 않은가? 끝이 없다는 건 사람을 정말 미치게 만든다. 정확한 목적지 없이 같은 행위만 계속 반복하는 것은 언제 끝날지 희망도 가질 수 없고,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민욱이 귀신이든 공부든 모든 것에 지쳐 포기하려는 순간, 영석이 형이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여기에 갇힌 건 그 자살한 귀신들이 샘이 나서 그런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돌아설 걸, 이렇게 후회하는 귀신들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이 거지같은 상황에 있지만 더 죽기가 싫어. 귀신들이 우리가 죽으려고 절벽에 섰다가 다시 살려고 절벽에서 멀어지는 걸 보고 질투하는 거라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살아있는 다는 건 죽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게 아니겠냐?”
결국 영석이 형의 말에 힘을 얻어 민욱은 자기를 괴롭히던 다른 귀신을 쫓아내고, 다시 살 결심을 굳게 한다. 바로 그 순간, 태종대는 민욱을 꼬드기는 것을 포기한다. 민욱이 해방감을 느끼며 출구를 나서던 순간이 얼마나 짜릿했을 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겠지.
태종대를 나선 민욱은 다시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 혜빈과 새로 만남을 갖기 시작했고, 공무원 공부도 이전보다 더 잘 된다며 웃는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이 왜 있겠어.
지금 당장 일이 풀리지 않으면 미래가 절망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민욱도 기약 없는 공무원 수험 생활이라는 상황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고, 귀신이 만들어 낸 출구 없는 태종대는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민욱의 마음이 형상화되어 나타난 공간이라 봐도 될 것이다. 그 곳에서 민욱은 과거의 트라우마까지 맞닥뜨리며 괴로워하지만 마인드컨트롤에 성공하면서 극복할 수 있었다.
당장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어쨌든 살 길이 있겠지,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아직 여기서 인생을 끝낼 수는 없다는 마음가짐이 민욱이 삶을 돌려받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어떻게든 길이 보이기는 하더라. 물론 그 길을 걸어가면서 더 열심히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 길의 끝까지 갈 수도 있고, 중간에 다른 갈래길로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나중에 뒤돌아 보면, 그 모든 길이 모여 ‘나의 인생’이라는 종착지로 통할 것이라 믿는다.
스트레스를 받아도, 두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마주한 이상 더이상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를 갑갑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 외면하기 보다는 한번 제대로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