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수 작가의 〈카밀라를 위하여〉는 상당히 독특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하기도 했던 이전의 여러 소설과 달리 〈카밀라를 위하여〉는 자극적인 청소년 소설의 느낌이 물씬 난다. 이 작품은 주인공과 등장인물 모두가 학생이며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 만큼 ‘트위터’ 등 SNS 활동의 언급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 작정하고 최신을 반영한 것처럼 다채롭고 과감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막상 청소년 소설이라고 단정 짓기가 아쉽다. 오히려 규정되지 않는 순간 멀리 퍼져나갈 이 작품의 둘레에 경계를 만드는 건 실례되는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이 소설의 위치가 희한하기 때문이다. ‘요즘 애들’의 말투로 쓰였으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 자극적인 말투 사이의 감정은 학생들만이 아는 암호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독자 모두가 해독의 천재로 변해있는 느낌이다. 이 신기한 소설을 읽고 있자면, 우리만 아는 그 시절의 교실로 돌아간 것만 같다. (다만 그 교실은 최신으로 업데이트되어 있다) 독자는 이 작품을 읽으며 각자의 학창 시절이 소환되는 기분을 느낀다. 현재성을 지닌 대사에 들어있는 경험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칼로 대사를 벼려낸 것 같은 날카로움이 매 행에 서려 있다. 모든 대사는 작가가 청소년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흔적이다.
〈카밀라를 위하여〉를 놓을 새로운 위치는 어디가 좋을까. 이 작품은 어떤 스펙트럼에 속할까. 글쎄. 그건 우선 차근히 읽으며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이란 무엇인가
위에서 말했듯 〈카밀라를 위하여〉는 100퍼센트 청소년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다. (세상에 100퍼센트 청소년 소설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하겠지만) 작품을 가르는 절대경계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면 왜 이 작품은 청소년 소설로서‘만’ 읽힐 수 없을까. 여러 시간을 고민해 얻은 결론은 읽는 과정에서 ‘부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멀리서 보기’가 수반되어야 한다. 학생의 입장으로 깊이 몰입하는 것보다 한 발 떨어져 멀리 볼 때, 보이지 않던 매력이 느껴진다.
“안세미는 담임이 공부 잘 하는 애들을 편애한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선생도 사람인데 성실한 애를 더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이 말을 가까이에서 한 번, 멀리에서 한 번 보자. ‘가까이’라고 함은 진서의 입장이고 ‘멀리’라고 함은 독자 자신의 입장이다. 진서의 시점에서 위의 문장은 가공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공부 잘하는 애의 뻐김’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걸음 물러선다면 위의 문장이 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세상은 편애투성이이므로. 확실히 아이보다는 어른의 시점에서 보이는 것이 많은 대사다.
사실 위의 문장은 일인칭으로 쓰인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재치 있고 과감한 부분이기도 하다. 서계수 작가는 누군가의 속마음을 어떤 거리낌도 없이 드러내는 데에 탁월하고 익숙하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청소년이라면 묘사에 한층 더 여유가 생긴다. 그의 소설은 ‘숨기지 않음’이 가장 큰 매력이다. 주인공 진서는 자신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을 안다. 내숭이나 겸손을 떨지 않는다. 친구들이 공부를 잘한다고 놀려도, 그 상황을 짜증으로 넘기기 일쑤다. 진서는 독자의 눈에 학생의 필터(filter)를 씌운다. 아이의 시점으로 어른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우리’.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뭐냐. 나랑 담임? 담임도 외고 시험 보게?”
진서는 담임이 하는 말에 날을 세운다.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전혀 가식이 없는 캐릭터는 가장 날것이다. 날것은 사실을 드러낸다. 어른의 가식과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인물은 역설적이게도 진서다. 앞서 말했듯, 진서의 대사는 조금만 뒤에서 보아도 어른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진서는 그렇기에 〈카밀라를 위하여〉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런 진서가 쓰는 ‘일기’이다. 어른을 보는 아이의 시점이 사실로 반영된 작품이기에 청소년 소설 이상의 매력을 지닌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의 시점은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는 삼인칭이 아니다. 일인칭 주인공이 쓰는 일기는 당사자와 매우 가깝다. 얼마나 쓰는 이의 마음을 잘 반영하고 있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일기에 거짓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시나 누가 볼까 두려워할 수는 있지만, 가식으로 쓰는 글은 더이상 일기가 아니다. 일기는 숨김없는 진서의 성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서술 방식이다. (이쯤 생각하면 작가의 의도에 거의 다 왔다) 일기와 가장 가까운 SNS 플랫폼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의견이 살짝 들어가 있지만, 트위터가 아마도 일기와 가장 가까운 성격의 SNS일 것이다. 140자의 짧은 글로 내용을 써야 하기에 한 번 쓰고 버려질 내용이 트위터의 주를 이룬다. 하지만 트위터는 무서운 밀도로 그 안에 한 사람의 일상이 흘러가는 모양을 담는다.
“다른 SNS도 많은데 왜 트위터냐면, 블로그는 요새 쓰는 애들이 거의 없고, 페이스북은 실명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점이 싫기 때문이다. 실명제라는 건 자기 계정에다가 부모가 지어준 본명을 달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걸 누가 좋아해? 누가 페이스북 검색창에다 ‘윤진서’를 검색해 나를 찾아내는 건 상상만 해도 싫다.”
게다가 트위터는 ‘익명성’이라는 환상적인 장치를 달고 있다. ‘익명’은 나의 비밀을 마음껏 말해도 직접적인 1차 피해를 받지 않는다. 누군가 작정하고 개인정보를 털어내지 않는 이상 글을 쓴 사람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필요도 없다. ‘진서의-일기와-트위터’는 ‘날것의-솔직한-익명성’이다. 트위터에 자신의 일기를 쓰는 진서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의 이미지를 가장 잘 반영한다. 일상적이거나 보편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특별함의 채도(彩度)를 높인 인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진서의 성격은 날카롭게 현실을 파고든다.
청소년이란 무엇일까. 아주 예전에는 청소년과 아이가 어른의 아류로 취급되던 시절이 있었다. ‘미성숙’한 인간으로서 청소년이 그려지던 때도 있었다. 어쩌면 최근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일부 작가는 청소년을 그렇게 그려낼지 모른다. 하지만 청소년은 때로 과감하다. 어른을 비판할 줄 알고, 더 나아가 기성세대를 반영할 줄 안다. 서계수 작가의 소설 안에서 미성숙한 청소년의 시대는 종결되었다. 아니, 그의 작품 안에서 청소년은 끊임없이 성숙하다. 날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한다.
전학을 간 세미와 그것을 견디지 못해 인형 카밀라를 비틀어 꺾어버리는 진서. 작품의 결말은 작가의 색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래도 피”가 나는 마지막 문장에서 “카밀라에게 피”를 보내는 진서의 행위는 세미와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가장 자극적인 방법이다. 세미를 보내야 하는 진서의 극단적인 심리 역시 잘 반영한다. 세미는 계정이 사라진 ‘요루’와 같은 사람일까. 이 소설은 여러모로 결말을 열어둔다.
그것은 진서의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가능성을 가늠하며
최신의 배경에서 인형으로 맺어진 두 아이의 관계는 잘 엮인다면 환상성과 현실성을 모두 내포할 수 있다. ‘카밀라’라는 이름의 인형과 그 인형을 진서에게 건네준 세미는 작품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소설을 읽으며 ‘표범성의 카밀라’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이 더욱 궁금해졌다. 애니메이션 속 장면의 묘사를 통해 어떤 주제나 메시지가 읽히기를 바랐다. 그 메시지가 바로 후반을 이끌어가는 열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영화에 기대지 않고 독립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좋았으나 ‘표범성의 카밀라’에서 〈카밀라를 위하여〉로 이어지는 의미의 끈이 한 줄 있었으면 더욱 선명한 결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카밀라’는 이 작품의 제목이자 세미와 진서를 엮어주는 소재이며 소설을 종결하는 결정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진서와 세미의 관계성, 그리고 반 아이들이 등장하는 장면 역시 남용되지 않는 빈도로 등장하면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 좋다. 청소년 소설의 느낌을 확실히 주고 싶다면 그편도 나쁘지 않다. ‘처키’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도 인상적이었는데 처키가 진서와 세미의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걸림돌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걸림돌이 있을수록 주인공과 대상의 관계가 결속된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길어질 때 매력을 가질 수 있다. 아직 숨겨진 이야기가 많고 그것은 독자에게 더 많은 의미와 메시지를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여러 날에 걸쳐 있고 에피소드가 풍성할수록 독자의 상상 역시 즐거워진다. ‘카밀라’의 규명과 인물 개인을 연결하는 관계의 타당성, 그리고 어른과 아이의 대립과 반영을 중심으로 소설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면 더 나은 방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충분한 완결성을 가진 작품이다. 진서가 이별에 대처한 방법은 앞부분에서 당위성을 확보해준다면 훌륭한 결말로서 기능할 테니 말이다.
맺으며
세상에는 어른됨으로 어른을 반영하는 소설, 아이에게 어른의 모습을 비추는 소설, 아이의 눈으로 어른을 보는 소설이 있다. 이 셋은 같은 듯 묘하게 그 성격이 다르다. 첫 번째는 익숙하지만 그만큼 낯섦이 덜하다. 두 번째는 적당히 낯설고 세 번째는 아주 낯설다. 서계수 작가는 〈카밀라를 위하여〉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중간에 적당히 위치한다. 이 작품에서는 어른처럼 보이는 아이와 어른을 보는 아이가 모두 등장한다. 그렇기에 청소년 소설로서 읽히지 않는 것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처럼, 어른을 위한 청소년 소설로서의 기능이 분명히 숨어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청소년 소설. 듣기에 좋은 말은 아니다. 게다가 그건 허상일 뿐이다. 규정은 때로 실례가 된다. 그러므로 경계(境界)를 경계(儆戒)해야 한다. 카밀라로 인연을 맺은 두 아이, 그리고 그들이 어른을 보는 가공 없는 시선을 보존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조용히 지켜보자. 아이들은 그들의 색과 목소리로 어른보다 나은 결말을 만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