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인공이자 주변인일지니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아르미안의 네 딸들: 블랙 애쉬 (작가: 미메시스, 작품정보)
리뷰어: 코코아드림, 21년 4월, 조회 51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멜레아그로스’라는 신화 속 인물의 서사를 예시로 들어보고자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멜레아그로스는 손에 꼽힐 정도로 창을 잘 던지는 명수였다고 전해집니다. 어린 나이에도 그 유명한 ‘아르고 호 원정대’에 참여한 이력이 있을 정도이며 부모는 칼리돈이라는 왕국의 왕과 왕비였으니 재력과 능력 그 어디에서도 빼놓을 데 없는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그런 그에게 존재하던 단 하나의 약점은 바로 ‘왕비(멜레아그로스의 어머니)의 침소에 위치한 난로의 장작이 모조리 다 타면 죽는다’는 예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예언을 듣고만 있을 리 없는 왕비는 급히 난로의 불을 끈 다음 타지 않은 장작 하나를 꺼내 따로 보관합니다. 그렇게 평탄하게 잘 살 것 같았던 멜레아그로스인데, 어느 날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멜레아그로스가 살고 있는 왕국 칼리돈은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헌정된 도시였는데 어느 날 칼리돈의 왕이 아르테미스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분노한 아르테미스는 칼리돈에 식인 멧돼지를 내려 보내고 날이 갈 수록 피해가 심해지자 멜레아그로스를 포함한 여러 사냥에 능숙한 사람들이 모여 멧돼지 사냥을 계획합니다. 다행히 멧돼지는 사살에 성공했으나 분배 과정에서 멜레아그로스는 자신의 외삼촌들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멜레아그로스는 멧돼지의 급소를 쏘는데 일조한 아르카디아의 공주 아탈란테에게 멧돼지 가죽을 넘겨주려 했지만 그의 외삼촌들이 그것을 반대하면서 상황이 점차 꼬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툼은 점차 심해지고, 결국 멜레아그로스가 외삼촌들을 살해하는 상황까지 벌어지자 왕비는 충격을 받아 충동적으로 보관하고 있던 장작을 난로에 던져버립니다. 그렇게 멜레아그로스는 모든 장작이 타버림과 동시에 사망하고 왕비 역시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에 후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참고자료 1: https://en.wikipedia.org/wiki/Meleager%5B/footnote%5D %5Bfootnote%5D참고자료 2: https://www.greekmythology.com/Myths/Heroes/Meleager/meleager.html%5B/footnote%5D

멜레아그로스의 서사는 그리스의 칼리돈 왕국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의 인간이 어떤 흥망성쇠를 이루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는 단순히 혼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멜레아그로스 라는 하나의 인물 주변에 존재하는, 혹은 특정 사건을 계기로 새로이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뤄낸 것입니다. 아르테미스 여신, 멜레아그로스의 어머니와 외삼촌들, 그리고 아탈란테와 멧돼지 사냥에 참여한 다른 사냥꾼들까지. 그들의 서사가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들의 시점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인 또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즉, 이 이야기는 서로가 주변인인 동시에 주인공인 구조입니다.

‘아르미안의 네딸들'(이하 ‘아르미안’)과 ‘아르미안의 네 딸들: 블랙 애쉬'(이하 ‘블랙 애쉬’)를 보면서 방금 전 언급한 서사 구조를 떠올린 것은 아무래도 ‘아르미안’의 서사 구조 역시 비슷한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칼리돈 왕국처럼 ‘아르미안’에서는 고대 페르시아의 속령인 갈데아 지방에 위치한 가상의 왕국 ‘아르미안’이 배경입니다. 왕국에는 네 왕녀가 있습니다. 38대 레 마누(아르미안 의 여왕) ‘마누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스와르다’, 치유 능력을 가진 ‘아스파샤’, 그리고 훗날 마지막 레 마누가 되는 ‘샤르휘나’까지. 누가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줄거리 속에서 독자는 네 딸들의 이야기가 얽혀 결국 하나의 큰 나무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서 뻗어난 수많은 뿌리들이 나무를 뒷받침해줌을 알 수 있습니다.

작중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사건은 자의로 일어난 일일 때도, 타의로 일어난 일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은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네 왕녀의 어머니는 인자한 레 마누로 유명했지만 왕권을 약화시키는데 일조했다는 평을 듣게 되고 훗날 마누아가 강력한 왕권 구축을 결심하는 계기가 됩니다. 마누아는 스와르다를 크세르크세스 1세 앞에서 춤을 추도록 시키는데 훗날 이 사람은 모종의 이유로 스와르다를 처형하고 아르미안을 침공해 멸망에 이르게 만듭니다. 샤르휘나는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어머니의 죽음 이전까지 머리를 검은 색으로 물들였고 이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누아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각인됩니다. ‘아르미안’은  이러한 복합적인 서사를 각각 네 왕녀들의 시선으로 그려내어 그들의 서사가 다른 이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고 또 다른 서사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주고, ‘블랙 애쉬’는 그 것을 뒷받침해주는 일종의 비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 멜레아그로스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자면, 칼리돈의 왕비는 어느 날 난로의 장작이 다 타면 자신의 아들이 죽을 것이라는 신탁을 듣게 되고 급히 난로의 불을 끈 뒤 타지 않은 장작 하나를 빼냅니다. 여기까지는 왕비의 서사입니다. 그리고 이 서사를 통해 죽지 않은 멜레아그로스가 커서 멧돼지 사냥에 나서면서 또 다른 서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아들이 자신의 오빠들을 죽였음에 왕비는 장작을 난로로 던져버리고 멜레아그로스가 그로 인해 사망, 즉 서사의 종말을 맞습니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오빠들을 잃고 본인의 의도로 아들이 죽는 왕비의 이야기는 서로의 서사가 하나의 나무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네 왕녀가 겪는 이야기의 예시로 들기 적절하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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