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시하누 작가의 ‘신들의 이야기’ 시리즈는 상당히 재미있는 구성을 취하는 세계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게는 신계와 인간계를 이분적으로 나누지만, 신계에 ‘반신’이 존재하며 인간계에도 신에 필적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둘을 완전히 구분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신들의 이야기’에 포함되는 단편들을 읽어보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전생과 비슷한 내용을 보며 개별 인물에게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장편인 《신의 정원》을 통해 전체적인 광경을 조망해 보았다.
이 작품을 쓴 작가의 장점이라면 ‘상상력’을 꼽을 수 있다. 이아시하누 작가는 판타지를 쓰는 사람으로서, 한 명의 창조자로서 인물을 두기에 가장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에 거침이 없다. 배경의 구조를 세우는 데에 상당 시간 공을 들였다는 것을 작품을 읽으면 저절로 깨닫는다. 게다가 그런 곳에 사연 있는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 역시 독특하다는 점을 큰 특징으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신의 정원》 역시 그렇다.
신이 가꾸는 정원, 아름다운 인간계에서 가슴 아픈 일을 겪은 한 소년이 있었다.
작품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지상과 천상, 그리고 중재자
이 작품은 크게 지상과 천상, 그리고 그 둘을 잇는 인물로서의 ‘로난’에 집중하여 세 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상에는 로난의 어머니 뮤아, 로난을 좋아하는 여자아이 유니란, 유니란의 아버지 바벨,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네휴레 등의 마을 사람들과 로난이 여행 중 만났던 이들이 속해 있다. 그리고 천상계에는 빛의 신 로헤튼, 예언의 신 베르나, 물의 신 메일, 규칙의 신 하레스 등이 살아간다. 그 둘을 이어줄 인물인 로난은 작품의 초반, 지상계에 속해있는 듯하다가 후반부에 서서히 천상으로 옮겨가며 존재의 의미를 확고히 한다.
이 소설은 모종의 사건이 촉발한 모험을 배경으로 한다. 로난은 잡초인 줄로만 알았던 푸취풀을 어머니의 음식에 잘못 사용함으로써 참혹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긴긴 여행을 떠난다. 겉으로는 능동적으로 짐을 꾸려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외부의 사건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통해 실상 그가 수동적인 인물형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로난이 ‘어쩔 수 없이 떠난’ 여행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어머니의 죽음에 더하여 유언처럼 남겨진 편지를 도구로 사용한다. 어디론가 떠나 아무개를 만나라. 일종의 가이드라인처럼.
이런 로난을 옆에서 돌보아주는 조력자로는 유니란과 에르나가 있다. 유니란은 고향의 친구로서 여행 초반의 로난을 보조하는 반면, 에르나는 여행 도중에 합류하는 인물이다. 보통의 조력자가 여행의 끝까지 함께하는 소설들과 달리 이 작품은 유난히 그들을 부수적인 인물로 그린다. 마을에서 도움을 받았던 이들, 함께 길을 떠난 사람, 보물을 선물하고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아이도 로난이 용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여럿이 주인공을 돕는 여정의 서사와는 조금 다른 맥락을 취하는 것이다. 오직 용을 만나는 일은 로난과 뮤아, 그리고 로슈난의 일이라는 듯, 작품의 전반에서 주인공을 홀로 두려는 분위기가 강하게 풍긴다.
이렇게 여행하는 소년을 두고 한켠에서는 신들의 묘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신성수를 오염시킨 범인을 찾기 위해 모두가 혈안이 된 신계에서는 하나의 예언이 공포된다. “푸른 정원의 정원사가 순결을 잃은 호수에 가장 맑은 빛을 비추리라”. 위의 문장은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중의적으로 해석된다. ‘푸른 정원’의 정원사와 ‘푸른’ 정원의 ‘정원사’. 이런 식으로 ‘푸르다’라는 형용사는 정원과 정원사를 모두 꾸민다. 그리고 둘 다 이 소설에서는 옳은 의미이다.
신성수의 오염은 지상과 천상을 구분하는 일종의 기재가 된다. 또한 긴 장편의 진행에 하나의 ‘추리’ 요소를 더하는 장치로도 쓰인다. 신들의 음용수인 신성수를 감히 누가 오염시켰을까. 규칙의 신인 하레스가 부들부들 떨며 화를 내는 것을 보며 독자들 역시 묘한 오싹함을 느낌과 동시에 배신자를 찾는 일에 골몰한다. 그리고 범인은 소설의 결말에 밝혀진다. 이 작품은 한 소년의 여정기일 뿐 아니라 신계의 수수께끼를 푸는 추리소설이기도 하다. 앞날을 내다보는 여신 베르나가 1화에서 던진 예언은 독자를 끈질기게 이끌고 가는 호기심으로 작동한다.
신성수를 정화할 수 있는 물건은 순수구였다. 〈신의 정원〉에서 구조적으로 허리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로난이 순수구를 찾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것은 지상과 천상의 과업을 모두 완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로난은 자신이 천상의 문제를 해결할 존재라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작가는 로난이 여행을 떠난 내내 그 사실을 숨겼다. 로난은 그저 돌아가신 엄마의 유언을 들어드리고자 고향을 나섰지만, 자신도 모르게 신계의 일에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순수구는 용이라는 이물이 보관하고 있던 하나의 열쇠였다. 열쇠를 찾은 로난은 신들로부터 명령과도 같은 부탁을 받는다.
신성수를 정화하는 의식을 통해, 그리고 예언에 따라 ‘호수에 가장 맑은 빛을 비출 정원사’는 결국 로난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작가는 이 예언의 답에 대해 몇몇 복선을 깔아두었다. 그중 가장 분명한 것은 로난의 검푸른 머리가 간간이 강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푸른 정원의 정원사”는 중의적 의미 그대로 풀이해야 마땅하다. 위의 예언은 정원뿐 아니라 정원사마저 푸르다는 것을 암시했다. 로난은 자신이 찾은 순수구로 신계에 올라가 오염된 신성수를 정화한다. 그리고는 빛의 신인 로헤튼의 사자로서 한 나라의 왕이 되며 긴 여정을 끝맺는다.
끝의 끝에서
이 작품의 끝은 작가가 왠지 “필요할 것 같아서” 썼다는 에필로그를 통해 완성된다(이는 상당히 겸손한 표현이다. 에필로그가 없었다면, 소설은 완전히 마무리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에필로그를 통해 자신이 왜 히에라와 유니란 등 ‘조연’을 주연에 비해 뒷전에 두었는지를 빠짐없이 설명한다. 히에라는 에필로그 이전의 마지막 화에서 다시 마을로 돌아온 로난을 반갑게 맞는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유니란은 죽음의 신인 타냐스의 사제가 되어 나타난다. (이는 작중 초반 유니란과 로난이 신전을 찾아갔을 때 약간의 암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로난을 따르고 싶어했던 유니란이 그와 완전히 정반대의 신을 따르게 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끝의 끝에서 완성되는 우정의 이야기는 완전해야 하기에, 작가는 빛과 어둠의 조화를 이용한다.
“오랫동안 어둠이 찾아오지 않는 축복”.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얼마나 고대할 축복일까. 유니란은 자신의 친구이자, 한때 좋아했던 사내인 로난에게 어둠을 따르는 자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축복을 내린다. 이로써 완성되는 이야기는 비단 신의 것만도, 인간의 것만도 아니기에 ‘신의 정원’이라 불릴 수밖에 없었다. 의문의 여자가 길고 긴 초대 왕의 기록을 흥미롭게 본 후 다음 이야기를 넌지시 던지는 방식으로 이 소설은 진짜 마지막을 독자들에게 보인다.
하늘과 땅은 이렇게 연결된다. 신성수를 정화하는 방식으로, 한 소년이 드디어 왕이 되는 방식으로.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여행을 떠난 로난, 결국 신의 예언을 따라 왕이 된 사람의 성장기가 이 작품 안에 담겨 있다. 겨우 인간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던 신들과, 그랬기에 더욱 순수하게 하늘을 도운 아이가 있었다.
이렇듯 이아시하누 작가는 정통판타지를 쓰며 아이들을 종종 등장시킨다. 확실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보았을 때, 전민희 작가의 『룬의 아이들』 시리즈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유독 청소년이나 어린이 세대의 인물이 겪는 일련의 사건을 소설화하는 구조가 해당 시리즈에서 많이 보이던 전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짐작일 뿐이다. 사실 미숙한 주인공이 성장하여 과업을 이루어내는 종류의 소설은 이전에 많이 쓰여 왔다. 그러나 아이들은 늘 신선하고 새롭다. 또한,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새롭게 펼쳐 놓았으니 《신의 정원》이 마냥 과거의 것을 답습하는 소설이라고 평가를 내린다면 상당히 좁은 시선으로 이 작품을 본 것이다.
한 명의 독자로서 이후에 이어질 ‘신들의 이야기’ 시리즈가 상당히 기대된다. 단편으로 보여주던 신들의 강렬한 뒷이야기와 지상-천상을 이어내는 작가의 상상이 맞물린 장편, 그리고 더욱 넓게 확장될 하늘과 땅의 끝이 어디인지는 작가에게 달려 있다.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러므로, 다음에 등장할 주인공이 천상과 지상에서, 또는 그 경계에서 떠날 여정을 힘껏 응원하는 것뿐이다.
아마도 내 예상을 벗어나 그 이상으로 멋지게 독자를 맞을 누군가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