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간 여행의 본질과 그 가능성에 대한 고찰〉은 재미있는 구성의 작품이다. 논문 같지만 결국 소설이며, 누구의 삶과도 거리와 먼 것 같지만 결국 모두와 가장 가까운 이야기다. “Is Time Travel Possible?”이라고 질문하는 첫머리의 문장은 그럴듯하게 모두를 도발하는 한편 담백하기도 하다. 사실 시간여행이란 것이 그렇다. 그것은 일정함을 거부한다. 과거가 미래가 되고 미래가 과거가 되는 일이 바로 ‘Time Travel’이다. 하지만 그것의 가능성은 늘 부정당했다. 특히 시간을 되돌리는 것. 사실 미래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심지어 우리는 일상에서도 빠르게 미래로 가는 법을 알고 있다. 잠을 자거나 술을 거나하게 먹고 필름이 끊긴다면 우리는 어느새 다음 날로 이동해 있다. 그 사이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는 경험은 덤이다. 하지만 어느 방법을 써도 과거로 가는 데에 성공했다는 인류와 과학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도 멋진 도구인 우리의 시간여행에 대한 증명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아마 〈[기고] 시간 여행의 본질과 그 가능성에 대한 고찰〉을 읽고자 시도한 독자들의 마음 한켠에는 이런 억울함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을 논문이라 한다면 시간 여행에 대한 가능성을 점친 앞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소설이라 한다면 뒷부분의 이야기에 무게를 실어야 한다. 그러나 이건 앞과 뒤를 아우르는 전체가 하나다. 소설도 아니고 논문도 아닌, 아니 사실은 가장 완벽한 소설이자 논문인 이 작품을 논해야 한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무엇을 건드려야 할까. 소설 안에 쓰인 무수한 과학적 가정과 법칙? 한 사람의 인생과 그가 살아가는 과정? 작품 안의 문체와 구성? 그것보다 ‘본질’적인 무엇은 없을까.
이를테면, 마트에 파는 ‘소주 한 병’처럼 완벽하게 떨어지는 무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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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의 본질은 ‘바람’이다. 소설에 쓰인 갈바노 입자의 바람이 아니라 기원(祈願)과 간절(懇切)이다. 어떤 과학적 증명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오직 정신만이 끝내 이룰 수 있는 일. 이 작품에서는 ‘후회’라고 명명되기도 하는 바로 그것 말이다. 후회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룬다. ‘이렇게 했더라면, 한다면, 그리하여 할 것이다’로 구성된 것들이 극대와 극소를 넘나들며 인생을 만든다. 어제는 후회의 날이지만 미래는 만회의 나날이 이어질 것이라며 희망을 갖거나 때로 그 기회를 잃은 채 절망하기도 한다. 우리의 감정과 행동은 그러므로 ‘바람’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 시간 여행의 본질인 동시에 이 소설의 본질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바로잡았어야 했다는 욕망을 가질 때가 있다. 태초의 인류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래 인간은 실수를 반복했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실수가 쌓이고 쌓이며 시간과 세계는 이루어져 왔다. 실수는 후회를 낳았고 인간은 그것을 반드시 되돌려야 했지만,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뱀이 들고 나타났던 과일은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를 통해 재현되더니 드디어 21세기의 소주가 되었다. 소주 한 병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은 아마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바, 가히 대단한 발견이라고 하는 이가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시간 여행과 소주는 닮은 점이 많다. ‘바람’ 중에서도 ‘후회’가 담겨 있다는 것이 그렇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소주는 마치 후회의 결정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작품의 초중반에 쓰인 현란한 과학적 가정과 가능성이 내놓은 결과물이라고 하기에는 소주가 너무 친근하지 않은가. 마트에 놓인 한 병의 투명한 액체, 대부분 사람이 힘들이지 않고 구매할 수 있는 그것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세계의 석학과 지식인들이 증명한 ‘시간 여행의 불가능’이란 무엇일까.
“지표를 떠나 광활한 우주를 탐험하는 이야기를 쓴 그 재기 넘치는 미래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뛰어난, 그러나 나이 든 과학자가 무언가가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의 확실히 옳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높은 확률로 틀렸다.”
위의 인용에서 작가는 아서 클라크의 사례를 든다. 그의 말이 이렇게 쓰인다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다. 작가는 서연의 입을 빌려 과거의 지식인들을 ‘나이 든 과학자’라고 부른다. 물론 그들이 세운 과학적 성과를 ‘낡은 것’이라 부르기 위함은 아니다. 그보다 밑바탕에는 과학이 낡은 것이 아닌 새것으로부터 발견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듯하다. ‘불가능’은 옛것이 되고 ‘가능’은 새것이다. 젊은이의 패기와 새로운 발견에 대한 확신을 이보다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문장은 없다는 것처럼 서연의 말에는 힘이 실려있다. 아서 클라크야말로 SF 작가이기 이전에 미래학자였다는 강조가 두드러지는 이유는 이 소설이 미래와 ‘가능’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미래를 바꾼다.
서연은 자신의 연구가 세상에 밝혀지면 “인류 문명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슬프게도 또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증명할 필요 없는 ‘답변’이었다. 누군가는 기술을 통해 권력을 독점할 것이었다. 소수의 인원이 다수를 점령하고, 결국 탐욕과 욕심으로 인해 사람들은 멸망할 것을 내다 본 서연의 가정은 당연하다. 하지만 정말 시간의 역행은 이런 어두운 미래를 가져올 수밖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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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이 있는 재앙을 막기 위해 “영 수상쩍은 제목의 논문 한 편”에는 편지가 동봉된다. 이런 걸로 종말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너무 안일한 행동이라고 판단하기는 이르다. ‘겨우’ 몇 킬로바이트 정도의 메시지로 멸망이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 작가는 막연한 낙관주의로 이 편지를 작품의 말미에 배치한 것이 아니다. 편지의 방식으로, 이 소설의 궁극적인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현재를 사는 이여. 부디 당신의 삶이 후회 없는 선택으로 가득하기를. 가능성을 붙잡을 지혜와 욕망을 관철할 용기와 억압에 맞설 힘으로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당신의 현재는 온 우주와 시간이 함께 만들어낸 기적이니까.”
온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 온 우주가 당신을 돕고 있다. 지나온 시간과 살아갈 나날에 후회가 없기를 바란다. 따로 떼어두고 보면 지금 유행하고 있는 가벼운 위로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이 작은 메시지는 소설에서 굉장한 위력을 발휘한다. 4만 자에 가까운 이 길고 밀도 있는 중편에서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던 부분은 “고작 144킬로바이트짜리 정보”였다. 어떤 점이 이 문장의 무게를 좌우했을까. 도대체 나는 왜 이 편지를 단순한 위로가 아닌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이 소설의 전체적인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부담스럽거나 힘든 무게감이 아닌, 진중하고 꼼꼼한 문장들 안에서 보이는 마음의 무게는 소설을 읽는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의 마음을 둘러싼다. 너무 가볍지 않은 인생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고스란히 소설에 녹아 있다. 모종의 사유로 후회하고 있는 당신이여, 울며 소주를 마셔야만 했던 그대여, 사실은 그 시간마저 기적이었다고. 말하고자 했던 작가의 메시지가 곧 이 소설을 끝까지 이끌어온 힘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소설은 과거의 후회를 미래에서 만회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하지 않는가.
제목에 대한 단순한 흥미로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면, 과학적 지식의 빽빽한 나열이 독자들에게 초반을 안내한다. 정신없이 가설의 과학 안에서 헤엄을 치다 보면 한 여성의 인생이 보인다. 아니, 두 여성의 인생이 보인다. 그도 아닌, 세 여성의 인생이 보인다. 그리고 어느덧 소설의 모든 문장과 인물이 우주를 이루고 당신을 바라본다. 그들의 손에는 뜨뜻하게 데운 소주가 한 병씩 들려있다. 아니, 이러면 술 권하는 소설이 되니까. 그들은 한 병의 뜨뜻한 소주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후회와 눈물로 점철되었을 그의 인생을 기다리며.
맺으며
이 소설은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증명이다. 내가 했던 실수와 과오, 그리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앞으로 일어날 무언가는 바로잡을 수 있다. 과거의 내가 지독히 싫고 밉더라도, 미래의 나는 사랑해줄 기회가 있다. 사실 소주는 당신의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는 듯이 오늘도 마트의 진열대에서 말없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소주를 쌉쌀한 인생에 빗대어 달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쓰디쓴 날에 달게 느껴지는 그 술을 오늘은 데워서 마셔보자. 물론 50도 이상의 소주를 마신다고 해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겠지만, 그래서 당신이 한 통의 편지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듯. 어떤 후회를 이기고자 했던 사람들은 이 논문을 세상에 내놓는다.
예컨대 그들은 우주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명을 힘껏 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