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正統)이라는 단어는 흔히 쓰이는 단어지만 무거운 의미가 담긴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저는 ‘바른 길을 가는’ 정도의 의미로 생각하고 사용하였습니다.
이 작품 ‘피그말리온 살인사건’은 정통 범죄소설입니다.
범죄소설, 범죄 수사소설은 추리 소설이나 미스테리 스릴러와는 그 결이 다릅니다. 물론 최근에는 다양한 형식의 범죄물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큰 틀로 보면 범죄 소설은 어떤 범죄의 시작에서 끝까지의 과정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형식을 가진 소설입니다.
그래서 추리 소설과는 재미를 주는 포인트가 많이 다르죠. 추리 소설은 최후의 순간 탐정 내지는 수사관이 검지를 치켜들고 누군가를 가리킬 때까지는 작가가 독자와 정보를 다 공유하진 않습니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의 긴장과 머리싸움을 즐기는 거죠.
범죄 소설에서 독자들은 사건을 맡은 수사관들과 함께 달립니다. 같이 증거를 모으고 같이 용의자를 심문합니다.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도 독자는 수사관들과 함께 합니다.
차근차근 맞추어나간 퍼즐이 드디어 희미하게 범인의 모습을 보여줄 때, 독자는 밤새 뒷골목을 달리고 며칠간 잠복을 끝낸 수사관이 되어 소설 속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피그말리온 살인사건’은 앞서 설명한 범죄 소설의 특징과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1. 범죄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 작품은 범죄자의 시점과 수사관들의 시점을 적절하게 혼합하여 글을 읽으면서 찜찜한 부분이 느껴지지 않는 시원시원한 전개를 보여줍니다. 수사의 기본적인 과정을 지나친 묘사나 슬쩍 넘어가는 부분 없이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수사관과 함께 범죄를 풀어나가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그것이 범죄 소설의 최대 장점이고 작가님은 그 부분을 잘 살리셨습니다.
2. 느끼하지 않은, 너무 퍽퍽하지도 않은
저는 일본 범죄물을 좋아하지만 영미권의 작품도 몇 권 읽어보았는데, 일본 작가의 작품은 읽다보면 손발이 약간 오그라드는 대화나 문장이 등장합니다. 당시 일본 문학의 추세가 아니었나 추측합니다. 그에 반해 영미권의 범죄 소설은 지나치게 러프합니다. 범죄물은 하드 보일드가 어울리긴 하지만 가끔은 안구 건조증이 걸릴 것 같은 삭막함에 완독을 포기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범죄 수사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가면서도 인물의 성격과 개성을 잘 표현해냈는데, 중요한 건 작가님이 그걸 스토리 전개에 방해되지 않게 해내셨다는 겁니다.
글을 쓰다 보면 항상 힘든 부분이 분배입니다. 인물의 묘사에는 어느 정도 분량이 적당할까? 사건 현장 묘사는?
모두 답은 없습니다. 많은 글을 써 보고 계속 교정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에선 읽으면서 ‘지나치다’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후반부의 인물에 대한 설명이 길어지는 부분에서도 오히려 그에 대한 연민과 이해가 자라날 뿐이네요. 전체적인 흐름을 깨지 않도록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분량으로 원하는 내용을 넣으신 작가님의 센스가 놀랍습니다.
3. 사이코패스란 무엇인가?
범죄물이나 스릴러물에 안 나오면 섭섭한 그 분이 여기서도 등장합니다. 범죄물의 프리패스가 된 사이코패스들은 이제 독자들에게 피로감을 줄 수도 있는 소재지만, 이 작품에서는 조금 독특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사이코패스가 감정을 배워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생겨난 범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냥 감정 없이 살았으면 아주 잘 살았을 것 같은 전도 유망한 예술가가 자신에게 싹트기 시작한 감정들 때문에 혼란에 빠지고 결국 범죄까지 저지르는 걸 보면서 과연 감정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범인은 완벽한 사랑을 꿈꾼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이 뭔지 알고 싶었다는 게 조금 슬프기도 하더군요.
범람하는 사이코패스들 중에 손꼽을 만한 독특하고 매력있는 사이코패스였다고 생각합니다.
4. 한국형 범죄 수사물
우리 나라는 우리나라만의 형사문화가 있죠. 살인의 추억이나 범죄 도시 등에 등장하는 한국의 수사관들은 일본이나 미국의 형사들과는 다른 우리만의 매력이 차고 넘칩니다.
너무 딱딱하지도 가는 곳마다 슈퍼 마리오처럼 다 때려부수지도 않는, 사람 냄새 나면서도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도사견 같은 한국의 형사들. 이 작품에서는 그런 매력이 철철 넘치는 한국의 형사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다양한 개성의 수사관들을 지켜보는 것도 이 작품의 매력 요소입니다.
이 작품은 브릿G의 범죄 수사물 중에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고 분량도 적은 편은 아닙니다만, 추리, 스릴러와 범죄물을 좋아하는 모든 독자 여러분들께 추천해드릴 만한 훌륭한 작품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느 분야던 정통에 가까운 것들은 절 실망시키지 않더군요. 정통 짜장면, 정통 무협, 그리고 정통 범죄 수사물도요.
정통 범죄 수사물에 매력있는 캐릭터, 한국형 하드 보일드의 감성에 감동까지 갖춘 스토리는 독자 여러분들께 즐거운 시간을 선사하리라 생각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