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공포에 관하여.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판타스틱 리조트 작동 매뉴얼 서문(2023 대한민국 과학소재 스토리 공모전 단편 대상) (작가: 사피엔스, 작품정보)
리뷰어: 윤지응, 21년 1월, 조회 91

* 본 리뷰에는 <판타스틱 리조트 작동 매뉴얼 서문>의 심각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 리뷰를 읽으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꼭 <판타스틱 리조트 작동 매뉴얼 서문>을 먼저 읽으시기를 강권합니다. 정말 좋은 작품이니 꼭 읽으시고, 두 번 읽으시고 그래도 소설의 여운이 남으신다면 이 리뷰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T.S. 엘리엇의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의 관심사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물론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떠올랐다고 영문학에 조예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워낙 대중적으로 알려진 시구니.

만약 캣츠를 떠올린 사람이 있다면, 뮤지컬 매니아라고 해도 좋다. 뮤지컬 캣츠는 T.S. 엘리엇의 시,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

영국의 전설적인 록그룹 딥 퍼플을 떠올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록장르의 진성 팬이다. Deep Purple의 노래 April의 곡은 T.S. 엘리엇의 황무지(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싯구가 나오는 시)의 영향력이 느껴지는 곡이다. 노래 가사 중 April is a cruel time 이라는 가사가 이를 짐작게 한다.

누군가 어? 어떤 소설에서 들어본 것 같은데,T.S. 엘리엇과 딥 퍼플! 이라고 한다면, 혹시 밀리터리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지 넌지시 물어보라. 김경진의 해양 3부작 중 하나인 남해에 T.S. 엘리엇과 딥 퍼플이 나란히 언급된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혹시 해변에서? 를 되물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내가 소개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이 되시겠다. [해변에서] 는 모던 라이브러리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소설 중 하나로, 영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작가 네빌 슈트의 1957년작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편소설이다. 같은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한 이 걸작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표지석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핵전쟁 이후 멸망해가는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을 잔잔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최후를 짐작한 사람들이 패닉에 빠져 버둥거리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체념과 절망이 반씩 섞인 마지막을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 속의 멸망은 울부짖음과 탄식과 절규가 난무하는 세상이 아닌, 조용한 한숨과 함께 천천히 다가온다. 마치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해를 다시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은 그렇게 조용히 잠들어간다.

이 위대한 소설은 앞서 소개한 T.S.엘리엇의 시, 텅 빈 사람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마지막 만남의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더듬어 찾고
그러면서도 애써 말을 피한다.
부어오른 이 강가에 모여서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쾅 소리가 아닌 훌쩍임과 함께.

* 원 시의 4절의 중간 부분과 5절의 끝부분에서 발췌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느껴지는 먹먹함. 세상이 끝나는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는 무기력함, 가늠할 수 없는 절망감. 그리고 황혼처럼 젖어오는 체념, 체념, 체념.

10년도 전에 읽은 소설 해변에서, 그리고 그에 영감을 준 시 텅 빈 사람들이 내게 준 것은 공포였다. 그리고 그 공포는 쓸쓸함을 타고 내 마음에 침투해 왔다. 결국, 모든 것이 끝난다. 바닷속으로 꺼지듯 잠겨 드는 해를 보며 말없이 훌쩍이는 우리는 모두 언젠가 서로가 서로를 잃고 뿔뿔이 헤어진다. 그 막을 수 없는 적막함, 고독함. 차라리 번개가 치고 태풍이 불고 빛이 번쩍여, 이 모든 마지막을 축하하듯, 비웃듯, 저주하듯 세상이 끝난다면, 그런다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세상이 끝나는 대사건이,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치러진다면, 그래서 내 삶도 우리의 모든 인연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당연한 진실을 사실로 목도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그 쓸쓸함을. 쓸쓸함의 탈을 쓰고 물 위에 던져진 잉크처럼 스멀스멀 번져오는, 침식해오는 공포를.

그 후로 한참을 잊고 살았던 쓸쓸한 공포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사피엔스 작가의 이 작품, 판타스틱 리조트 작동 매뉴얼 서문이었다. 감히 말하건대, 이 작품은 내가 읽어본 2020년 브릿G SF 단편 중 가장 큰 울림을 준 작품이라 하겠다. 다른 수많은 걸작 중에서도 이 작품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바로 비겁함이다.

우선 제목이 비겁하다. 판타스틱 리조트 작동 매뉴얼 서문이라는 제목을 들었다면, 그리고 브릿G에서 단편 소설을 좀 읽었다면, 거기다 사피엔스 작가의 전작들을(특히 수상한 소설가의 수상한 연애일기) 읽었다면 대충 이렇게 짐작할 것이다. 판타스틱 리조트라니 아, 이거 뭔가 말랑말랑한 SF 소설이겠구나, 아니면 브릿G에서 유행하는 규칙괴담이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소설을 클릭했다면, 나와 마찬가지로 훌륭히 낚였다. 제목의 비겁한 미끼를 그야말로 덥석 물고 만 것이다.

소설은 원고지 200장의 단편이지만, 연대기적 서술 방식을 일부 빌리고 있다. 처음에는 런던의 이층 버스를 탄 기분으로 우주의 가상공간으로 진출한 인류의 모습을 유유자적하게 즐기게 해준다. 반복되는 풍경에 조금씩 졸리다가 나도 모르게 잠깐 졸았다 깨어나면, 소설은 도심을 한참 벗어나 있다.

아까까지 분명 피카딜리 서커스의 화려한 야경이 나를 감싸고 있었는데 잠깐 졸았다고 어두 컴컴한 숲 속을 질주하고 있다. 이때부터 뭔가 이상함이 느껴진다. 어? 이거 말랑거리는 소설이 아니었어? 그 사이 사람들은 천천히 망가져 간다.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세상이, 모든 존재 자체가 천천히 분해되어 간다.

그렇게 당혹감을 느끼며 창밖을 보면 헉 숨이 턱 막힌다. 버스는 늪지대를 달리며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 옆 사람을 흔들고 운전기사에게 달려가 고함을 치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넋이 빠졌다.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그 눈빛에 전염된 듯, 나도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이 지점에 사피엔스 작가는 반전 아닌 반전을 던진다. 판타스틱 리조트 작동 매뉴얼 서문이란 제목의 의미. 그것을 알고 나는 웃어버린다. 그런 거였어. 그런 거였어. 처음부터 작가는 이 모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런던의 불빛을 관통하며 달리는 이층 버스는 표를 사는 내게 이미 말하고 있었다. 이 버스의 종점이, 이 소설의 종점이 끝없이 침식하는 공포, 쓸쓸함의 가면을 쓴 공포라는 것을. 그것을 알고도 올라탄 내 잘못이 크지만, 이것을 숨긴 제목의 비겁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 마지막까지 스크롤을 내리고 나서, 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난 늪에 빠졌다. 다리부터 차오른 검은 진흙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 허리를 지나 가슴을 넘어 목까지 타고넘더니 기어이 내 정수리까지 삼켰다. 그리고 떠올렸다. 이 질척거리는 감정의 정체. 대략 10년전, [텅 빈 사람들]을 읽으며 느낀 감정. 훌쩍임과 함께 꺼져가는 세상을 보는 그 느낌, 그리고 해변에 앉아 바다를 보다 오른쪽으로 쓰러져버린 마틴과 그를 보는 루디의 뒷모습. 오래 잊고 있었던 그 쓸쓸함이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작가는 비겁하게도 이 쓸쓸함을 달래줄 사탕도 없이 소설을 끝내버린다. 비겁하다.

판타스틱 리조트 작동 매뉴얼 서문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막차가 30분도 더 전에 떠나 아무도 없는 공주버스터미널에 앉아 식어버린 캔커피를 마시며 오지 않을 버스를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다리는 날이라면, 얼마 안 남은 배터리를 아껴가며 다시 읽어볼 것 같다. 소설이 주는 쓸쓸함이 더해져 그날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알게 되겠지. 쓸쓸함은 어디선가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건 언제나 내 옆에 서서 나를 보고 있다. 지금도. 내일도. 뻔히 알지만 알고 싶지 않았던 그 사실을 던져주고 소설은 떠났다. 늪에 빠진 나를 남기고. 그래서 말한다. 비겁하다고.

 

사실 이 리뷰는 본 소설이 리뷰 공모를 하던 기간에 쓰여졌다. 하지만 먼저 응모된 리뷰를 보니 의미없는 미사여구로 점철된 내리뷰는 초라할 뿐이었다. 그래서 응모기간이 끝나고 해도 바뀐 2021년 하고도 보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리뷰를 올린다. 뻔히 질 싸움이라고 피했다는 비판이라면 기꺼이 받겠다. 소설이 비겁해 좋아하는 팬이라면, 그 팬 또한 응당 비겁해야 옳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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