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소위 위인이라는 이들의 삶을 엿보면서 그들과 비슷한 삶을 꿈꾸고는 했었다. 그들처럼 노력하면-영감은 1%밖에 없더라도 99%의 노력을 더하면 된다니까!-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물론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현실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연하게도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기에 ‘당연하게도’ 그런 것인지, 혹은 나 같은 사람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시선은 항상 역사의 주인공들에게만 향해있다. 하지만 나같이 평범한 -혹은 그 이하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언제부턴가는 주인공이아니라 그 주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끼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시선이 향하기 시작했다.
<꽃망울 : 4·19 혁명 기념일 특집>은 평범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 이야기를 그려 낸다. 어떤 시대적 상황인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던 ‘해규’의 시선으로 당시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왜 기준이 거리로 뛰쳐나갔는지, 며느리는 왜 다급히 기준을 찾으러 다니는지 ‘해규’는 알 수가 없다. 피울 생각은 않고 꽃망울만 맺은 꽃의 이름만 그저 궁금할 뿐이지만, 물어볼 이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아 끝내 그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만을 덤덤히 들려준다.
4·19 혁명을 이야기하는데 보통 4·19 혁명에서 이야기되는 것들은 빠져있다. 작가 스스로도 ‘뜨거웠을 혁명의 열기와 그 업적을 중심으로 쓰려는 마음도 컸습니다’ 라고 밝혔듯이 혁명의 열기와 그들이 이뤄낸 업적은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덤덤하게 -그동안 작가가 보여준 많은 글들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을!- ‘여운’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이런 방식이 독자들로 하여금 당시의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 같다. 그 당시 보통의 사람들에게 오늘날 보통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내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다. 이렇게 평범하게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구구절절 어떤 설명 없이도 그 시대를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혁명의 열기와 업적을 바탕으로 특정한 누군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시선으로 풀어낸 <꽃망울>은 그만의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그 길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이루기위해서 꼭 나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으며, 저마다의 ‘내’가 함께해서 그 자체로 대단해질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역사에는 ‘국민’ 혹은 ‘시민’ 등의 뭉뚱그려진 이름으로 남겨지더라도 결국에는 뭉쳐진 그 힘이 우리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개인의 ‘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말이다.
가슴 아프지만 역사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이룬 과거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날을 겹쳐본다. 여전히 누군가가 망쳐놓은 나라를 바로 잡기위해 부모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서는 어린 아이들과 학생들부터 흰머리가 무성한 노인들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촛불로 거리를 가득 메운 우리들의 모습을 말이다. <꽃망울 : 4·19 혁명 기념일 특집>에서 그렇듯이, 오늘날 우리 현실의 모습에서 그렇듯이 결국에는 영화 속 히어로 같은 주인공이 아니라 너와 나로 이어진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처음 <꽃망울 : 4·19 혁명 기념일 특집>은 단편으로 만났는데, 이제는 ‘달력에 기록된 각종 기념일과 절기 등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 모음’의 『달력 단편집』이라는 이름으로 연재중이다. 새로운 시도에 재미있는 이야기나 의미 있는 이야기도 많이 담겨있으니 관심 있게 지켜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