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안드로이드의 도움(?)을 받아 일하지 않고 땀흘리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편하게 생활을 영위해갈 수 있는 미래의 황금기에 살고 있다.
미래는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 사람들이 과거에서부터 그려왔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기를 인류의 황금기라고 부른다면 딱 좋을 그 어느 때.
단지 아쉬운 게 있다면 화자에게 거슬리는 것은 가전제품을 취급하듯 안드로이드를 박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특히 화자가 소유한 구형 안드로이드인 캐서린은 가사를 전담할 뿐 아니라 위기의 순간 화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몸체에 파손도 당한다.
화자는 생활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감정의 공유도 겪으면서 안드로이드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 강박적일 정도까지 계속 질문을 던진다.
안드로이드가 감정을 지닐 수 있는가 하고.
그 와중에 파손된 안드로이드의 다리 때문에 가사노동의 수고로움도 깨닫고 다치기도 하면서 스스로 마련한 시련을 통해 성장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감정을 가진 동물을 먹는 행위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조육을 생산하는 것처럼 화자가 캐서린에게서 감정의 발생을 계속 묻는 것도 목적있는 행동으로 보인다. 즉 필요에 따라 거리낌없이 안드로이드를 취급하는 인간의 태도 변화를 촉발하기 위한 근거의 하나로 안드로이드도 감정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래서 화자는 글의 전편에 걸쳐 캐서린의 행동반응 하나마다 촉을 세우며 감정의 발생을 의심한다.
그걸 증명해야 인간이 자신의 손으로 제작한 안드로이드에게 가전제품을 취급하는 것 이상으로 최소한의 예의를 가지고 대할 테니까.
그리고 화자처럼 안드로이드를 소중히 대할 줄 아는 사람의 감수성이라면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나 장애인에 대한 혐오, 후진국 국민에 대한 평등한 의식, 더 나아가 약자나 동물, 자연과 생태계 전반에 이르기까지 정의롭고 공평한 윤리를 가지고 인간 외의 것들을 대하는 질적 수준의 상승을 지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안드로이드를 박대하지 않는 인류의 양심을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 미래를 끌어왔을 뿐 현재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도처에 산재한 문제를 푸는 열쇠가 바로 이런 민감성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SF소설의 흔한 소재인 안드로이드의 감정을 다루고 있지만 단편적인 사건 속에서 흥미롭게 인간의 세계관 전체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게다가 화자와 안드로이드 사이의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알콩달콩한 감정 교류와 감성이 풍부하게 글 전체를 관통하고 있어 심각한 주제도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오게끔 전개되고 있다.
술술 읽히는 가독성의 장점 아래서 묵직한 감동이 펄떡대는 심장처럼 숨쉬고 있는, 재밌는 소설 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