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작다. 내 말은, 그러니까, 어린아이에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을 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상품 공주놀이 세트를 사 주면 된다. 전교 1위, 운동신경 발군, 외모에 대인관계까지 출중한 한 여학생이 길가에서 펑펑 울고 있다. ‘세상을 전부 잃은 것처럼’. 왜일까? 가장 친한 친구랑 오늘 절교했으니까. 어른들은 늘 청소년들에게 시험준비로서의 공부만이 아닌, 견문 – 이른바 발로 뛰는 공부 – 을 넓히라고 한다. 그러면서 무어라고 덧붙이던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직접 보라고. 사람의 나이와 그를 이루는 주변 세계의 크기는 비례한다. 개인적 경험의 질고 양, 그리고 개개인의 자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은, 음, 적어도 지금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세카이계의 ‘세카이’는 일본어로 ‘세계’의 독음이다. 청소년 나이대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그 속의 세계는 좁다. 진정한 사랑, 우정, 자유, 청소년기에 꿈꾸고 갈망할 만한 모든 것들이 주가 되고, 나머지는 그 세계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든 방해물일 뿐이다. 필자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몇 안 되는 세카이계 애니메이션인 <날씨의 아이>를 본 적이 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락 밴드 래드윔프스(RADWIMPS)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와중 나는 자문했다. ‘어쨌든 주인공이랑 주인공 여자친구는 다시 만났군. 잘 된 일이야. 그런데, 중간에 물에 빠져 죽었을 법한 사람들은 전부 어떻게 된 거지?’
진정한 사랑과 그 사랑이 향하는 대상이 전부인 세계 – ‘세카이’계에서, 그 이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악역이나 부산물 정도라면 모를까, 그 정도가 끝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알고 있다. 이 세계는, ‘나’와 ‘너’, 그리고 ‘나머지 이러저러한 방해물들’로만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그 시절 공감하지 못했던 ‘방해물들’ 또한, 나름대로의 사정들이 존재하며 – 그 과정이 심히 부조리할 뿐 – 모두 각자의 의지를 관철하며 살아나갈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등장인물 이세상은 무너져가는 ‘세카이’에 살고 있다. 그 작은 ‘세카이’ 속에서 이세상은 신이요, 분쟁지역의 최종병기며, 우주시대의 파일럿이자 초능력자 비스무리한 것이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너와 나 말고 아무것도 필요없는) 좁아터진 곳에서는 누구든지 절대자든 뭐든,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부조리와 ‘방해물들’로 가득찬 현실 세상에서, 이세상은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따돌림 당하는 전학생일 뿐이다. 이세상은 자신만의 ‘세카이’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김수영’과 함께 도망치는 이상향을 꿈꾼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거나, 적어도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끔찍한 이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또한 은연중에 알고 있다. 두 ‘세계’ 사이에 갇힌 이세상은, 급기야 극단적인 방법으로 하나의 ‘세계’만을 택하려고 한다.
반면 이세상의 ‘세카이’에 우연찮게 빨려들어간 박수영은 – 박수영 또한 ‘방해물들’의 피해자였지만 – 세계를 보는 시선이 사뭇 다르다. 박수영은 이세상이 이끌어 준 작고 아름다운 ‘세카이’에서 내면의 울분과 억울함을 마주한다. 하지만, 자신은 어찌됐건 바깥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하고, 비록 괴로울지언정, 언젠가는 더 커다란 세계를 마주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도 은연중에 알고 있다. 박수영은 세계의 부조리에 의해 수영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 때 폭발시키지 못한 강한 에너지는 독서라는 형태로 남아,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항하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에 공감한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 책 속의 세계는 끝이 난다.
<호밀밭의 파수꾼>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홀든은 세상에 대한 환멸감에 찌든 젊은이다. 그의 부모님과 선생님을 비롯한 대다수의 어른들은 순수함이란 없는 꽉 막힌 꼰대들이고, 소위 ‘친구’라고 불리는 또래 아이들 또한 폭력과 위선에 찌든 속물들일 뿐이다. 중간에 홀든을 진심으로 이해해준 몇 안 되는 인물인 다정한 노은사도 끝끝내 홀든을 잡아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홀든이 가장 실망하고, 혐오하는 대상은,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을 찾아 무작정 방황할 뿐인, 이 추잡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순수함’은커녕 아무 것도 지킬 수 없는 약해빠진 ‘홀든 콜필드’, 바로 자신이다. 거듭되는 방황과 자기부정 속에서 홀든에게 비친 마지막 빛은 다름아닌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나가면서도 순수함을 잊지 않은 자신의 여동생, 피비였다. 피비로 하여금 홀든은 구원받는다.
이 넓은 세계가 부정성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어두운 방을 가득 채우는 작은 양초처럼, 순수함을 계속 가져나갈 수 있다는 증명을 얻은 것이다. 홀든은 비로소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진다.
마치 둘만의 작고 소중한 세계에서부터 각자 자신의 소중함을 깨달은 이세상과 박수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