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Chapter 4 – 가면의 마법사(2)’ 회차까지를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마법사가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의 마법을 써야 한다면, 어떤 것을 사용할까.
이 작품의 인트로를 보고 떠오른 생각이었다. 우리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판타지의 세계관. 현실에서는 마법을 써본 이가 없기에 더욱 가닿기 힘든 상상이 펼쳐지는 작품을 읽을 때면 늘 마음 한쪽이 이상해진다. 어떻게 인간은 마법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가상의 존재에 시선을 두게 되었을까.
어쩌면, 사람 중에도 마법을 써본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마법을 사용하는 대단한 존재라도 마지막이란 존재하는 법. <마법사의 마지막 마법>은 한 존재의 끝에서 시작하는 작품이다. 세상을 바꾼 현자의 마지막 말에서 시작되는 소설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장난스러운
정통 판타지의 느낌을 주는 도입과 달리 소설의 배경은 한없이 현대적이다. 퇴사하는 것이 두려운 주인공 ‘솔’이 어느 날 벼룩시장에서 노트를 사는 것으로 시작되는 첫 번째 이야기는 아무래도 독자들이 여러 방향의 궁금증을 느끼도록 한다. 인트로의 마법사는 누구일까. 그가 지워버린 세상은 무엇이며 새로 세운 세상은 무엇일까. 솔이 사는 곳은 ‘바뀐’ 세계일까.
소설의 처음, 특별히 장편의 도입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질문하게 만드는 소설은 두 종류이다. 아주 잘 짜였거나, 아주 헐겁거나. 나는 이 소설이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의 질문이 내용의 덜 짜임에서 출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판타지에서 현실로 정확히 180도 뒤집힌 느낌이 드는 도입은 ‘반전’을 주며 호기심을 극대화한다. 아주 잘 짜인 소설만이 뒤집힌 세계를 서서히 돌려 처음의 세상과 끼워 맞출 수 있다. 이아시하누 작가는 분명히 소설의 강약과 방향 조절에 재주가 있는 작가다. 그는 독자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미 이야기를 뒤집어놓았으므로, 복구 역시 멋지게 해낼 것이다.
이런 그의 가능성을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첫째는 인물의 탄탄한 짜임이다.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얀’과 ‘솔’, ‘문’은 각각 ‘카드’, ‘노트’, ‘가면’으로 대응되는 일종의 마법도구를 지니고 있다. 물론 솔은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세 인물과 도구는 정확히 다른 색을 가지며 분명하게 아무것과도 겹치지 않는다. 이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나의 판타지적 식견은 그리 깊은 편이 아니지만, 가상의 힘인 마법을 이토록 선명하게 그려내는 작가는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장면 하나하나의 진행과 묘사가 작가 특유의 색을 띠고 있으며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이어지는 전개 역시 매끄럽다.
앞서 말했던 것과 연관 지어 보자면 이아시하누 작가의 두 번째 장점은 ‘마법’의 표현이다. 무형의 기운이 날아가고 사람이 자빠지고 하는 일련의 상황은 뚜렷하게 묘사하는 것이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마법을 다루는 인물들은 예로부터 심심치 않게 자신만의 무기나 기운이 깃든 물건을 가지고 등장한다. 물건은 가시화되어 있기에 보이지 않는 ‘기운’보다는 그 이미지를 잘 전달할 수 있다. ‘어떤 기운’이 날아가는 것보다는 ‘카드’가 날아가는 것이 상상하기에 편하며, ‘주문’을 중얼거리는 것보다 ‘종이’에 글자가 떠오르고 사라지는 편이 뚜렷이 신비롭다. 얼굴을 ‘마력’으로 변하게 했다는 문장보다는 아무래도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하기에 좋을 것이다. 적어도 이 소설의 독자들은 마법이란 것을 써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소설의 전개에서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친절한 묘사를 해두었다고 평가해도 될 듯하다.
세 번째로 소설에 드러나는 장점은 ‘균형’이다. 인물이나 사건, 능력 중 어느 한 가지도 균형이 되는 지점에서 독자에게 지나치게 멀거나 가깝지 않다. 이것은 장편을 쓰는 작가에게 플롯을 짜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문장과 장면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독자들은 집중을 잃는다. 소설이 지나치게 빨리 진행되면 복잡함을, 느리게 진행되면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 세 명의 등장인물과 세 개의 마법은 안정감을 준다. 3은 그런 숫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에 무언가 추가되거나 빠지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 작가에게는 장편의 균형을 맞추는 힘이 있으니 주저 말고 다음 회차를 써주셨으면 하는 독자의 작은 바람이다. 좋은 작품은 늘 독자의 마음을 재촉한다. 아주 완벽한 이야시하누 작가의 세계에서 세 명의 인물이 겪는 좌충우돌은 흥미로운 동시에 긴박하고 현장감 있다. 작가의 문장과 능청스러운 이야기 진행력에 뻐져든다면 헤어나올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법과도 같은 이야기에
따라서 이 소설의 장점을 더 발전시키기 위한 여러 갈래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내가 뭐라고 이런 글을 쓰고 있나 싶기도 하지만, 이래저래 하는 말들 속에 작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 하나는 있기를 바라며 이 마법과도 같은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독자 한 명으로써 작가님께 여러 가지 마법의 도구를 선물하고 싶다.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장점은 인물의 좋은 짜임이었다. 인물이 흔들린다는 것은 장편에서 대단한 손실이기에 장편을 쓰는 훈련을 하는 작가들이 가장 많이 한다는 것 중 하나는 ‘인물의 설정’을 정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물 각각에 대한 전기(傳記)를 쓰는 것이다. 소설과 관련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써 내려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작품을 채울 힌트를 얻을 수도 있고 흔들리던 이야기를 바로잡을 수도 있다. 이 단편의 인물들은 적절한 곳에서 꼭 맞는 색을 내고 있으니 작가가 이미 인물에 대해 빼곡히 정리해 두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얀, 솔, 문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이들과 세계에 대해서 한 번쯤 정리하는 작업을 거쳤으면 한다.
두 번째 장점은 ‘마법’의 표현에서 보였다. 이아시하누 작가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마법들은 조금 특별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봉과 지팡이 등의 물건이 아닌 카드, 노트, 가면 등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현실에서 마법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제 쓸모가 있다. 늘상 보는 것이며 집에 쌓일 정도로 많고,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만큼 독자들이 자주 보는 사물이라는 뜻이다. 마법을 ‘현재’로 가져온 것은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내기에 매우 유용하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물건들이 마법을 가지고 있다면 이보다 흥미로운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의 도구를 작가가 활용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것들은 분명 어떤 대단한 마법 도구보다도 독자에게 현실감을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현실감을 살린다는 것이 굳이 지루하게 보인다면 전혀 그곳에 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 작가가 소설 안에서 쓰는 마법은 이미 그 자체로 흥미롭다. 도구에 구애받지 않고 마법의 ‘리스트’를 써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현실이라고 해도, 결국은 ‘마법’을 쓰는 이들의 이야기이기에 작가가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마법’의 표현이다. 마법의 상호작용이 눈에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 이 작품의 장점이기에 나는 ‘도구’보다 그 안에 깃든 것에 더 집중할 것을 작가에게 요청하고 싶다. 이아시하누 작가는 균형을 잘 잡기 때문에 어느 쪽에 가중을 두어도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균형을 잘 맞추기 위한 방법에는 ‘도식화’가 있다. 세계의 균형과 치밀함은 지도에서 오고 인물의 균형과 치밀함은 가계도에서 온다. 장편은 앞서 말했듯 소설의 밀도가 가장 중요하다. 이 작품이 끝까지 장편으로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균형이 중요하다. 그림이든 글이든, 아니면 작가가 편하게 여기는 다른 방법으로든 소설의 세계는 반드시 단단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물들이 그 안에서 자유로이 놀아도 붕괴하지 않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아직은 시작이니까
놀랍게도 이야기에 대한 말을 전혀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은 이 소설이 도입의 단계에 있다. 솔과 얀의 만남, 문과 솔의 관계에서 앞으로 뻗어 나갈 이야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문은 어째서 마법사라는 것을 숨기고 평범하게 학교에 다녔을까. 마법을 쓰는 이들은 얼마나 넓은 분포로 세계에 존재할까. 마법을 수집하는 이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분배자와 벼룩시장의 판매상은 어떤 관계일까. 그리고 결국 뒤집힐 현재와 판타지가 만나는 접점은 어디에 있을까. 흥미에 뿌리를 둔 나의 질문은 여전히 생겨나고 있다. 이것들이 하나하나 해결될 소설의 뒷부분을 기다릴 수 없을 지경이다.
이아시하누 작가는 장편에서 빛나는 작가다. 단편을 한 작품도 읽지 않고 이 말을 하기 좀 그렇지만, 오히려 이렇게 희한할 정도로 한 작품에 강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장편의 이야기를 이렇게 짜임새 있게 보여준다면 작가가 이미 글의 밀도를 보는 데에 있어 꽤 좋은 안목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장편은 넓은 세계관과 시간, 사건들이 놓여 있기에 흔들리기 쉽지만, 작가의 문장과 이야기의 흐름에는 부러울 정도로 독자를 흡인하는 능력이 있다. 소설의 부족한 점을 집어보려 했지만, 소설의 단점을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맞춤법 이외의 뚜렷한 수정 사항이 보이지는 않았다. 이야기가 조금 더 진행된다면 커다란 플롯과 스토리텔링의 강약, 설정의 구조가 보일 것이라 기대한다. 지금은 한 번의 꼼꼼한 퇴고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아직은 시작이니까, 모험이 벌어지기 위해 충분히 시동을 걸어야 하니까. 그러므로 독자로서 무한정 대기 상태에 돌입해 본다. 작가를 믿고 이야기를 믿는 마음으로.
현대의 마법이 생기고 사라지는 과정을 따라가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법사가 마지막 마법으로 만들어낸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어떤 방향으로 뻗어 나갈까. 이아시하누 작가가 만들어갈 작품의 색을 기대하며 마법과도 같았던 이야기의 감상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