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물 소설을 처음 접할 때 드는 생각은 고증을 통해 시대 배경을 묘사하는 데 들었을 작가의 품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은 과거로 떠나는 간접 경험을 통해 마치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기분처럼 기분 좋은 호기심과 설렘을 느낍니다. 녹색빛 연구도 그 기분과 생각으로 스크린을 터치해 내렸습니다.
시대는 19세기 말, 런던입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입니다. 배경과 주인공이 처한 처지 면에서 닮은 점이 있습니다.
산업화 시대의 영국 사회는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모든 폐해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배금주의 사상이 만연해 있고 양극화는 극단적으로 나타나 빈민층에 대한 생명경시는 런던의 안개처럼 사회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의 생명은 짓밟히기 쉬운 대상입니다. 어른들의 도덕과 인식이 성숙해지기 전의 사회에서 아이들의 노동과 가치는 공장의 소모품마냥 취급되고 있습니다. 약하고 어린 것을 돌보는 기사도 정신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나 생기는 것이고 생존이 과제인 사회에서 아이들은 밟히는 낙엽만도 못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방정환 선생의 글을 보면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어린이날이 제정되어야 할 필요성이 사회에 팽배해지는 때를 겪습니다.
시대의 도덕적 감수성은 대륙을 가로질러 함께 성장하고 공유되는 성질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회에서도 어른들 중에는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선 보모인 도리스 노파가 그런 인물입니다.
주인공이 성장하고 위기를 겪어나가다가 성공하는 일대기 과정을 그릴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바로 조력자의 도움입니다. 도리스 노파도 내적 갈등이 있었지만 아이를 양육하는 어른의 역할을 끝까지 방기하진 않습니다.
산업화 시대의 어른들은 어떤 위치에 있든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해야 할 경찰은 살인 사건을 대하는 데도 무관심에 더해 조롱까지 하는 권력 계급의 하나일 뿐입니다. 경찰 계급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변태를 거쳐야 할 듯 합니다. 정의는 이런 사회에 뿌리내리기 어려운 싹입니다.
의사는 의사대로 생명을 살려야 할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입니다. 단지 이주민에 대한 증오와 인종차별적인 시각 때문에요.
비난의 화살을 교육자만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네요. 그래도 가정교사로서 존경을 받는 인물 한 명은 끝까지 남아 있어 안심입니다.
한편, ‘죽음의 천사’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어 갑니다.
정체에 대해선 결말에 가야 드러납니다. 제 손으로 정의를 찾게 된 주인공 그린과 ‘죽음의 천사’ 사이에서의 심리전과 추격은 이 소설에서 가장 술술 읽히는 부분입니다.
재미를 직접 확인하시길 바라는 의미에서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피하겠습니다.
독성 물질인 비소가 몸에 끼치는 폐해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화학자나 광고주들에 이르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절로 떠오릅니다. 환경과 인명을 무시하는 자본의 힘은 괴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특히 그 처벌이 약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아 새삼 비분강개하며 그 대목을 읽어내려갔습니다.
환경 문제, 사회의 정의와 양심이 사라진 시대의 민낯, 이주민에 대한 혐오, 녹차가 녹차라떼가 되었던 이유, 페인트의 독성에 대한 상식, 이 모든 것들이 잘 직조된 직물처럼 소설의 날실과 씨실이 되어 있습니다.
광기가 번득이는 ‘죽음의 천사’조차 비소 중독에 의한 피해자라는 설정은 뜻밖의 전개입니다.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이 분량에 비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는 가독성 좋은 소설 한 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