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서 이야기를 즐기는데 가장 중요한 도구는 상상력일 것이다.
독서의 과정에서 상상력은 때론 묘하게 작동하기도 하는데, 작가의 묘사가 세밀하면 세밀할수록 상상력은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재구축보다는 묘사의 엄정함을 따지고 드는 데 쓰이기도 한다.
아니 적어도 나는 작가의 묘사가 대충대충이라면 ‘대충대충 신경 안 써도 되는 것인가 보다~’하고 넘기고 마크로 디테일한 수준으로 엄정하다면 ‘신경 써서 각 잡고 제대로 머릿속에 그려보라는 거구나~’라고 느낀다.
엄성용 작가의 작품들을 즐기다 보면 발견되는 공통점이 한가지 있는데 ‘고속버스’의 고속버스 라든지 ‘아직 살아 있나요?’의 폐쇄된 산장이라든지 본 작품에서의 이세계로 날아가 고립된 지하철 한 칸 이라든지 한정적이고 폐쇄된 공간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설정하고 디테일하게 묘사하는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연극에서의 무대 셋팅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영화에서의 촬영 장소의 설정 같기도 하다.
전자의 경우라면 관객이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고정된 카메라가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다양한 위치에 배치된 여러 대의 카메라로 다양한 시점을 담아내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든 작가의 훌륭한 액션 묘사를 살려내기엔 효율적인 설정이다. 액션의 동세가 이루어지는 동선이 명확하게 그려지고 액션과 그에 영향받는 주변 배경의 리액션도 확실하게 묘사된다는 장점이 있다.
조금은 아쉬운 것은 액션이 이루어지는 방향성이 종종 혼란스럽고 모호하다는 것이다. 사실 지하철이라는 공간에서의 액션의 방향선은 수평 공간으로 이루어지는 게 어찌 보면 가장 속도감과 명확성을 살릴 수 있는 데에 적합하지 않은가?
사람의 눈은 횡적으로 움직이는 사물을 인식하는데 가장 최적화되어 있고 또 그런 움직임에서 큰 속도감을 느낀다.
(찬란했던 전성기의 홍콩 권격영화들의 프레임 구도와 동선을 떠올려 보시라~)
반면 본작에서의 가장 중요한 괴물들이 지하철 안으로 침입하려 하고 주인공들이 그걸 막는 액션의 방향성은 프레임의 바깥에서 안으로라는 깊이가 있는 방향성을 띄는데 근래 영화에서 이러한 방향성을 제대로 카메라에 담아내는 감독은 세 손가락 안에 꼽기도 힘들다 생각한다. (사실 대부분은 3D 영화 라는 타이틀을 부각하기 위한 깜짝 효과용으로 삽입된 장면들이기도 하고…)
이야기의 큰 얼개는 ‘신도 부처도 없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하고 일어선다는 전형성을 띄면서도 언제나 매혹적인 주제를 잘 살리고 있다.
이를 테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어부 중 한 명일 산티아고 노인이 수십 시간의 사투 끝에 얻어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장엄하게 외치는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인간찬가적인 선언과 ‘인간은 위대하다!’는 사상적 뿌리와 정신적 골계미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서울시 지하철의 인구밀도를 고려해 보자면 장기적으로 괴물들이 점점 이계의 지하철로 유입되는 수가 늘어나는 전투종족 인간, 개중 극성맞기로는 어디 가든 빠지지 않을 마도 서울시 주민들에게 쓸려나갈 전망이 그려져 괜히 유쾌한 웃음이 지어지기도 했다.
인물들의 배치 역시 기능적으로 잘 설정되어 있어서 이런 주제를 잘 살려주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든다.
나는 살인범 캐릭터는 조금 더 극악무도했으면, 형사는 조금 더 얼간이 같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데 결국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악조건을 딛고 일어서는 상황의 찬란함을 부각하려면 암부를 더욱더 깊게 묘사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직장에서 상사한테 혼나고 집에 와서 부인에게 바가지 긁힌 거 정도의 상황에서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선언을 하는것과 직장에서는 잘리고 할부 개월도 한참 남은 차는 도난 당하고 힘들게 집에 왔더니 부인은 내연남 또는 내연녀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고 둘이 후식으로 내가 가장 아끼는 개를 끓여 먹은 상황 정도는 되어야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선언이 더 찬란하고 장엄하게 들리지 않을까?
모든 밝고 좋은 것은 결국 그걸 부각해줄 만한 어둠의 깊이가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