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회반점은 만두 맛집이다. 그러니 일단 우리 만두를 먹으며 얘기해보자.
우리가 만회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낙원에 갈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뱃속에 도로 넣어버리고 싶은 이들에 대해.
시아버지, 남편, 아들의 순서로 숟가락을 들어야 할 정도로 숨막히는 곳이라면, 셋 중 하나는 “뱃속에 도로 넣어버리고 싶”은 매일이라면. 기름기 도는 만두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보신’이라면. 이렇게 말하고 보니 갑갑하고 답답하지만 이 무거운 가정은 주변에서 여전히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시아버지와 남편은 그렇다 쳐도 아들만은 도로 뱃속에 넣고 싶다. 삼대 독자라는 구식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우고 싶다. 누구나 세상에서 지우고 싶은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누가 버려주지도 않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눈에 밟히는 만회반점에 방문해보는 건 어떨까.
만회반점은 이름부터 강렬하다. ‘반점’으로 끝나는 음식점 이름이 대개 그렇듯, 기름지고 아침부터 먹기엔 약간 부담스러운 음식을 파는 곳이겠지만 왠지 정감이 간다. 젊은 여성 주인이 주문을 받고 주인공은 음식을 기다린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리는 쩝쩝 소리. 주인공 외에 다른 손님은 없다. 쩝쩝. 물리적으로 긴장감을 주는 소리다. 맛있게 무언가를 섭취하고 싶은 소리다. 주인공의 마음에서 새어나오는 것일까. 게걸스럽게, 무언가를 먹고 싶어하는 욕망일까. ‘섭취’로 만회를 해보자는 일종의 부추김일까.
이윽고 주인이 내온 만두는 상상 이상으로 맛있다. “제대로 못 드시고 다니는 것 같던데요”. 사장이 내뱉는 무심한 말조차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주인공은 문득 남이 아닌 자기 몸을 돌본 적이 있는가 생각한다.
“첫째가 딸이었기 때문에 낳도록 종용받은” 둘째가 아들이어서, 시아버지는 소고기를 사왔다. 항상 그녀는 아들의 배경에 존재했다. 자신은 없고 누군가의 며느리, 아내, 엄마로 여성은 존재했다. 그러나, 정말 자신에게는 그뿐이었나. 여성은 만두를 먹으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일말의 틈을 가졌는지 모른다. ‘생’을 강요받으며 먹었을 쇠고기보다, 주인의 건성거리는 말투를 들으며 먹는 “튀긴 밀가루 음식”이라도 오로지 자신을 위한 음식에 여성은 편안을 느낀다.
개는 낙원에 가지 못해
이 작품은 여성의 목소리로 이어지지만, 이어지는 곁가지로 ‘개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몸보신을 위해 바쳐지는 동물. 여성은 구역예배 시간에 읽은 요한계시록 구절을 읽고 ‘개의 쫓겨남’에 대해 생각한다. 구역예배를 위해 간 윤 집사의 집에서 천사처럼 졸고 있는 고양이와 ‘쫓겨난’ 개는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어째서 개일까. 언뜻, 뜬금없는 장면이 될 수 있는 구역예배의 장면은 자신의 아들에게 ‘보신탕’을 해먹여야 하는 여성의 처지와 연결점을 갖는다. 그리고 그 어느 장치보다 소설에서 훌륭하게 여성의 생각을 대변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개-보신탕-여성’으로 이어지는 연결점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만 하는’ 이미지를 개와 여성에게 부여한다. 물론, 개와 여성 모두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왜 이들은 ‘희생’의 프레임에 갇힌 것일까. ‘인간-남성’으로 연결되는 강요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신들을 위해, 타자의 생을 갈구하고 착취하는 이들. 그들에게 오랜 시간 죽임당해온 수많은 존재들을 서계수 작가는 ‘개와 낙원’, 그리고 여성’을 통해 그려낸다. 이는 주인공 여성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며 구역예배에서 나온 여성이 만회반점으로 향하는 장면은 필연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개는 낙원에 가지 못”한다는 주인공의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개처럼 추방당한 존재는 낙원에 가지 못하잖아.
하지만 만회해보자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있는 곳이 만회반점이니까. 군만두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보자. 냉동육이 아닌, 갓 잡은 고깃감이 무엇인지 상상하면서. 주인공이 이곳에 ‘매일’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발견해보자. 내 속에 있는, 다지고 싶은 무언가를 만두에 짓이겨 넣는 상상을 해보자. 주방에 가서, 재료를 확인해도 덤덤할 정도로 나를 고통에 무뎌지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입해보자.
식인은 폭력적이다. ‘먹는 것’에 대한 상상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고, 잔인함의 극단에는 식인이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육식은, 다른 보신은 괜찮을까. 우리는 무자비하게 동물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의 몸이 아닌 영혼을 잡아먹는 이들을 본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한 존재를 부인하는 다른 종류의 ‘식인’에 대해 떠올릴 수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식인보다 잔혹하고 끔찍한 일들을 많이 보게 되며, 목도의 순간, 구역질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들이 곳곳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그것을 한 데 넣고 버무린 만두소를 먹는다면 어떤 맛이 날까.
낳는 순간 “나는 구덩이로 밀쳐질 것이다”라고 직감했던 그 아이를 도로 뱃속에 넣는 도구로 주인공은 ‘만두’를 택한다.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먹었던 음식. 기름진 부담스러움이 잊혀질 정도로 긍정적이었던 맛. 가장 잔인한 복수가 소설의 마지막에 펼쳐지지만 어쩐지 담담하고 일상적이다. 만두라는 음식이 주는 깊은 평범성이 잔인함의 색채를 지우는 것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 장면이 깊이 마음에 닿는 이유는 앞부분의 식사장면과 이어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식사장면에서 여성은 ‘아들의 몸을 보신시켜야 하는’ 존재였다. 시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먼저 숟가락을 들어야 밥을 먹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인공은 소고기를 먹어야 했으며, 개와 자신을 동일시해야 했다. 하지만 후반의 식사 장면에서는 여성에 대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여성은 자신의 방법으로 ‘보신’을 한다. 자신을 위한 음식을 만들었다. 비록 그게 아들을 넣은 만두일지라도. 아들을 뱃속에 넣고 싶다는 일종의 소원을 성취한 것이다.
결말부를 읽고 나는 깊은 아이러니에 빠졌다. 분명히 이 소설은 폭력적인 살인과 범죄를 다룬다. 하지만 그것이 이토록 해방감을 주는 이유는 뭘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서계수 작가의 ‘맞불 작전’이 통했다는 것.
여성은 자신에게 불꽃처럼 다가오는 폭력에 역으로 불을 붙였다. 가부장적 압제와 권위로 인해 수 년, 어쩌면 십수 년, 수십 년에 가깝게 축적된 폭력에 일순간 맞불을 놓은 것이다. 맞불은 불을 끄는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두 개의 불이 활활 타다가 꺼지면 남는 것은 없다. ‘비어있음’이 남는다. 그리고 그 자리는 (특별한 인명적, 재산적 피해가 발생하는 지역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다시금 무언가 새로 채워질 공간이 된다. <만회반점>을 읽는 과정은 정확히 이와 같았다.
조용히 모든 것을 불태우던 폭력과 그에 맞서는 강하고 짧은 불꽃이 쓸고 지나간 터는 굉장히 넓었다. 나에게 <만회반점>은 공간을 생각으로 꽉꽉 채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여러 종류의 폭력에 대해, 개와 고양이에 대해, 낙원과 지상에 대해, 모든 것을 태우는 불과 그것을 태우는 또다른 불에 대해 생각했다. 슬쩍, 개발중인 집 근처에 만회반점이 문을 여는 상상을 하며 오싹한 기분을 느끼기도 해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정리하는 시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아주 좋았다.
만회하고 싶은 시간에 대하여, 그리고 속을 가볍게 해주는 만두에 대하여 말하는, 머리를 뜨겁게 달구었다 식히는, 이 매력적이고 짧은 소설을 읽고 우리 만회반점에서 만나자. 주인 여성의 무심한 말투와 각자의 몸보신을 생각하며 오늘은 낙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만두를 먹어보자. 자장면도, 짬뽕도 아닌 군만두만 한상 가득 주문하고 입천장이 다 데일 때까지 맛있는 만두를 먹다가, 문득, 갑자기 집이나 회사, 세상의 어딘가에 있는 좋은 만두 속재료가 떠오른다면, 주인에게 말을 걸어보자.
끝내주게 맛있는 이 만두의 속재료가 무엇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