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새 것을 좋아합니다. 정확히는 새 것만이 줄 수 있는 낯섦과 설렘의 기대감을 좋아한다고 봐야겠지요. 하늘을 날거나 우주를 탐험하고, 번지점프를 하고, 동네 빵집의 신 메뉴를 고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새 것의 느낌은, 때로는 기존의 관념을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줄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클리세 비틀기라는 말이 유행하고, 다들 실천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내가 비틀면 뒤틀린 황천의 수제비인데, 전문가가 비틀면 꽈배기인 것처럼, 비트는 것도 실력 차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5성 호텔 주방장이 만든 꽈배기, 낙원과의 이별 시작합니다.
1.어이, 이 각은 [직각]이다
낙원과의 이별은 정통 판타지 로맨스입니다. 각각 동양, 중동 문화권을 배경으로 가진 두 여성, 남성 주인공이 주연으로 나오고, 황실을 배경으로 한 각종 사건과 로맨스가 이야기의 주된 서사입니다. 자세한 건 브릿g 소개문 켜라 고전적인 궁정 로맨스물의 현대적 각색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방금 전까지 치고 박던 두 나라가 화평을 공고히 하게하기 위해 공주를 시집보내면서 생기는 일은 고전 중의 고전이니까요. 다만 여기선 장가를 온다는 게 다르네요. 시대적 배경도 꽤나 세상이 복잡해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차이점이 있군요. 충분히 매력적으로 복잡하지만 이해는 쉬운, 그런 좋은 세계관입니다.
이야기의 진행도 세계관만큼이나 완숙합니다. 몇몇 로맨스물에서는 서사가 캐릭터 간의 관계형성(로맨스)에 끌려가서 거칠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오전 9시에 송아지 스테이크 썰러 갔다가 강형철 과장에 의해 비건법 위반으로 강제 구금되어 만나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낙원과의 이별에서는 서사와 로맨스 간에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외국출장 나간 재벌가 출신 간부와 현지 회사 간부가 공항에서 첫 인사하는 걸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즉, 개연성과 핍진성 모두에 부합한다는 뜻입니다. 전쟁 중인 게 그렇게 평범한 상황이냐는 질문은 무시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전쟁을 하나정도는 가지고 있잖아요?
이러한 점들을 살펴볼 때, 작가가 아주 공들여서 세계관과 이야기를 빚어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정말 동아시아에 있을 법한 국가, 중동에 있을 법한 국가 그 자체입니다. 많이 알고 설정하는 것과 최적화해내는 건 다른 문제인데, 그걸 훌륭히 해낸 겁니다. 너무 훌륭하게 말이죠…
총평하면, 각 잡고 썼다는 말 외에는 덜하거나 더할 말이 없습니다. 문방구 각도기나 저녁점호 3분 전의 훈련소 관물대도 이보다는 덜 직각일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딴 거 다 필요 없고 제국이라는 체제를 제대로 묘사한 게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제목도 특별히 여왕 넣어드렸습니다. ㄲㄲ
2.템포, 템포, 템포.
이야기의 속도는… 꽤 오묘합니다. 느리게 진행되는 것 같더라도 잠깐 살펴보면 어느새 벌써? 라는 생각이 절로 드니까요. 다만 확실한 점은 최근의 트렌드와 비교하면 좀 느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측이지만 주연인 진원과 선우 사이의 관계와 감정이 한 두 번의 우연으로 생긴 것도, 또 깊어지는 것도 아님을 세밀하고 꼼꼼하게 보여주기 위함인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회상이나 시점 변화로 조절을 하는데, 본 작품은 작중 로맨스 외적인 사건들을 추가하여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판을 너무 많이 벌려서 혼잡해지거나 주객전도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데, 현재까지는 그러한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차후 전개를 위한 포석으로 보이는 서브 스토리도 좀 눈에 보이지만 말입니다.팬심으로는 종군하던 시절 이야기가 좀 더 나왔으면,
3.papers, please.
앞서서 세계관과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최적화하였다고 말했습니다만, 역설적으로 그로 인해서 진입장벽이 좀 높은 편입니다. 꼭 해외여행을 준비하면서 그 나라에 대한 정보를 찾는 기분입니다. 심지어 평소 뉴스에도 자주 나온 익숙한 나라가 아닌, 거의 이름만 들어본 수준의 나라말입니다. 왠지 소련 붕괴 전 러시아로 처음 여행 가던 분들 기분이 이랬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누가 제국 아니랄까봐 정치체제 및 황실, 왕실도 복잡한데, 거기에 종교도 있습니다. 관청제도는 소싯적에 역사 좀 보던 실력이 있어서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아뿔싸, 관직명을 생각지도 못했네요. 거기에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낯선 어휘에 예스러운 표현까지.
브릿g에서 국역 제승방략이나 승정원 일기, 부족지를 보는 기분이 드는 건 아마 이번이 처음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직관과 독해스킬을 발휘하면 크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습니다만, 불편함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작가야 주석이 짜다 좀 팍팍 넣어라
4.그래도 당신은 봐야 한다.
이처럼 느린 속도와 진입장벽이라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여러분은 꼭 낙원과의 이별을 봐야만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좋은 글은 둘째 치고 애초에 나름의 습속을 갖춘 a4 5장 이상의 글은 대학교 기말 대체 과제 외에는 없는 이 시국에, 이만한 완성도를 갖춘 글 자체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일단 공을 치는 건 확실한데, 그게 안타냐 홈런이냐의 차이만 존재하는 그런 수준의 글입니다.
산이 거기에 있으니 오르는 것처럼, 좋은 글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읽어야죠, 뭐.
<끝>
ps1. 문득 든 생각인데, 제목이 낙원과의 이별이고, 동양과 중동이 나왔으니 왠지 집안에서 독립한 후의 배경은 서양일 거라는 킹리적 갓심이…
추천 대상
로맨스라면 사족을 못 쓴다.
배경이 동양풍이라면 환장한다.
고유명사나 설정이 넘실거리는 글을 즐긴다.
정치와 드라마가 수준 높게 조합되는 걸 좋아한다.
높은 직관적 이해와 ‘좋은 게 좋은 거지‘ 감성 소유자다.
완성도 높은 글이라면 종류불문하고 환영한다.
비 추천 대상
탈아입구 맹신자
뭐든 결말까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최대 5분이다.
일일 3사이다에 활명수로 마무리해야 속이 편하다.
마라톤보다는 100미터 달리기가 더 좋다.
내가 연애를 못하는데 무슨 로맨스물인가? 참고로 전 00년 한이 응어리진 모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