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는 다 완벽해. 인간이 예전부터 갈망한 곳이야. 우리 셋도 이곳에서 만나고 친구가 되었잖아. 그런데…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곳은 진짜가 아니고 모두 가쟈야. 저 푸른 하늘., 이 분수대, 지금 이 거리들, 이 모든게 다 가짜인데 진짜인 듯 우린 착각하고 있어.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고. (…) 이곳이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사람들까지 있어. 진짜 세계에 있는 내 자신과 마주치기가 싫고 두려울 뿐이야.”
“그냥 AI 가상세계에 사로잡혀 사는 게 훨씬 행복할텐데 왜 깨어나려고 하는 건지. 현이씨가 사람들을 더 불행하게 만들어요.”
본다펠리스 작가의 <애프트>를 보면서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행복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SF에서 흔히 묘사되고 있는 시스템으로 인간의 감각을 왜곡시키고 공간을 조작하여 가상화된 허구의 삶을 현실의 삶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 하지만 진실이 왜곡된 삶이 진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공정과 부조리에 관한 진실을 감추고, 문제 자체를 해결해야할 대상에서 배제시키는 시각이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왜곡하고 축소시키는 것 아닐까? 모조사회는 개인을 현혹시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만들지만 그 실상은 사회로부터 착취당하는 거짓된 모조 (模造)의 삶일 뿐이다. 거짓이란 한번 만들어지면 반드시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고, 결국 그것이 진실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 아닐까?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토피아를 꿈꿀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현재의 삶을 딛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바람직한 사회나 미래에 달성해야 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니즘은 기본적으로 희망의 철학이다. 하지만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는 절망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이 주장하는 유토피아를 사회가 추구해야할 유일한 대안으로 강조할 때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변질될 수 있다. 누군가 바람직한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것을 거부하는 타인에게 강요할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를 강요하는 행위와 양립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유토피아는 단순한 공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꿈을 간직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희망하고, 실패하는 반복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희망을 꿈꿀 수 있다. 현실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대안으로 유토피아가 제시되고 디스토피아로 변질된 유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인류는 발전해왔다. 앞으로도 거듭되는 실패를 감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진보해나갈 것이다. 이상향은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에게 강요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동의 삶을 위해 희생하면서 또, 자발적으로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 모여 거대한 결속을 이루면서 이들이 함께 꾸는 꿈은 유토피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