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귀(虎鬼)로 보는 자유의지, 운명론과 프시코마키아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호귀(虎鬼) (작가: 테라리엄, 작품정보)
리뷰어: 베르메르, 20년 2월, 조회 145

안녕하세요. 베르메르입니다.

이 소설 감상문은 호귀의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반지의 제왕, 하얀 늑대들이 떠올라서 쓰게 되었습니다.

영미 판타지 소설의 아버지, 톨킨이 쓴 반지의 제왕에서는 캐릭터가 캐릭터가 아닌 알레고리와 상징으로 존재하며 커다란 줄거리에 캐릭터들은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는 구조라서 소설의 주제가 대단히 종교적입니다. 톨킨 작가님이 반지의 제왕을 쓰면서 북유럽신화, 핀란드 신화, 켈트신화와 그리스로마신화와 아서왕 신화와 실낙원을 참조했지만 그의 무의식적 마인드에서는 그리스도교__ 가톨릭의 교리, 상징과 선과 악의 묘사__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서 드러나는 가톨릭의 원죄론, 자유의지와 운명과 예정론

기독교의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천지, 동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여자를 위해 에덴 동산에서 생명나무와 에덴동산의 중심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었지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서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남자와 여자는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자유의지와 지성이 있었습니다. 두 남녀는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자마자 육적인 눈을 뜨게 되면서 벌거벗은 부끄러움으로 무화과 잎으로 가렸습니다. 사람의 자유의지로 원죄를 짓게 되면서 죽음이 들어왔고 죽음의 대가는 하나님의 단절인 사망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의 타락과 원죄의 상징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에서는 흥미로운 상반된 주제가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론입니다. 톨킨 작가님은 가톨릭을 믿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실마릴리온과 반지의 제왕에서는 기독교적인 알레고리가 등장합니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주인공 프로도 (평범한 사람의 상징)가 절대선을 지향하면서도 사우론 (기독교의 뱀, 마귀, 죄와 유혹)의 손으로 타락한 절대반지 (욕망)의 유혹을 이겨나가면서 그의 자유의지는 드문드문 보이지만 일루바타르의 보이지 않는 예정론에 따라 절대반지를 운명의 산에 던져넣으면서 절대선이 승리하는 선악의 대결의 종지부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즉 캐릭터의 의지가 곧 신의 의지이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명들이 옳기 때문에 가는 길입니다. 물론 캐릭터들의 의지는 줄거리 속에서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갈등도 빚으며 길을 잘못 들기도 하지만 커다란 물줄기 속에서 소설의 캐릭터들은 전부 보이지 않는 신이 조종하는 세계에서 운명을 따라가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운명인지 모릅니다.

이것을 심플하게 표현하면 하얀 늑대들의 작가, 윤현승이 표현하고자 하는 운명론과 맞닿아있지만 톨킨과 윤현승이 다루는 주제를 보면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납니다.

윤현승 작가님이 놓쳐버린 것은 무엇인가?

윤현승 작가님이 쓴 소설들을 살펴보면 영원히 되풀이하는 주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의 생사는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의 영향력 아래에 좌우되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운명의 최상에 올라가거나 구렁텅이로 처박힙니다. 윤현승 작가님이 다루는 작가가 다루고 싶은 등장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그가 원하는 소설의 주제는 과거, 현재와 미래를 자연스럽게 오가면서 주인공이 만났던 과거의 사람들, 현재에 만나는 사람들과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대한 플롯에 펼쳐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윤현승 작가님이 얼음과 불의 노래와 반지의 제왕을 모방해서 하얀 늑대들을 썼지만 빠뜨린 게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 정의론, 선과 악을 분별하는 윤리와 원죄였습니다.

리디북스에서 하얀 늑대들의 수정된 리뷰를 봤는데 윤현승 작가님이 가졌던 문제를 정곡적으로 찌른 리뷰여서 여기에 옮겨 씁니다.

예전에는 하얀 늑대들이 개띵작이었는데 지금보니 슈벨이랑 빌리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지. 작가님은 1부에서 하얀 늑대들에 애정갖게 해놓고 슈벨이랑 빌리 개뜬금 등장시켜서 신분이랑 서사주고 블랙 사연있는 캐 만들어서 미워하지 말라는 듯이 빌리랑 한편 만들고 뭔가 싶네요. 얘네들 새나디엘 여왕 보러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 힘들게 하고 죽였고 민간인이랑 경비병들 죽였는데 아란티아에서는 처벌 안함?’ 

하얀 늑대들은 1세대 판타지 소설을 풍미한 수작이고 주인공 카셀을 비롯한 아란티아의 하얀늑대들 기사단과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의 대립으로 고전적인 알레고리~선과 악의 이분법을 다루고 있지만 빌리와 슈벨을 보면 악인에게 안락한 면죄부를 주는 회색지대를 만듦으로써 익명의 독자에게 혼란을 주었습니다.

빌리와 슈벨이 악행에 벗어나서 하얀 늑대들한테 가려면 그들이 먼저 행했던 원죄로 인한 악한 행동을 깨닫고 나서 양심의 고통을 느낀 후에 점점 변하는 심리를 묘사하면서 가책을 가지면서 속죄한 후에 스스로 자유의지로 희생하는 결말을 보여야 독자들이 납득합니다.

제가 윤현승 작가님의 소설을 읽으면서 위화감을 느꼈던 이유는 정의라는 개념의 부재였습니다. 하얀 늑대들에서 카셀과 하얀 늑대들은 절대악을 무찌르기 위해 대립하지만 윤현승 작가님은 주인공과 일행을 써서 반드시 싸워야 한다.’라고 쓰지, ‘하얀 늑대들 기사단이 정의를 위해서 왜 싸워야 하는지, 그들이 선과 악의 균형점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의와 선한 일인지, 악한 일인지 맞는 건가깊게 고민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빌리와 슈벨에게 선악의 모호한 줄타기를 부여해주니 독자들은 하얀 늑대들에 나오는 정의론, 선악의 구분론에 회의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윤현승 작가님은 거대한 서사를 쓰는 능력이 있지만 기본적인 인물과 심리묘사 연출실력을 비롯한 선악의 부재, 정의론과 윤리가 부족해서 빌리와 슈벨의 행동의 개연성과 당연성이 납득되지 않으면서 공감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윤현승 작가님은 플롯을 이끌어가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지탱하는 대들보는 작위적인 연기, 운명론과 우연성에 의존합니다. 이 서사장치들은 고전소설에서 쓰기에는 좋지만, 현대소설에서는 케케묵은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얀 늑대들에서는 운명론과 예정론이 섞여있지만 윤 작가님이 놓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호귀의 프시코마키아/영혼의 투쟁

그것은 호귀에서 보여줬던 선악의 프시코마키아: 영혼의 투쟁, 그리고 박출로 보여주는 자유의지였습니다.

반지의 제왕과 하얀 늑대들에서는 선악의 갈등, 기독교의 예정론과 운명론으로 비유되는 고전적 판타지 주제가 등장한다면 호귀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사명이 부각됩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나오는 프로도는 내적 갈등을 겪지만, 보이지 않는 일루바타르의 의지에 따라 목적을 완수하려는 체스말을 맡고 있다면 호귀의 주인공, 박출은 선한 존재이지만 그에게는 소설의 악역, 아귀에 맞서서 싸워야 하는 동기와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박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악을 저울질하면서 악의 유혹에 빠지거나 동조하면서 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축복이자 저주인 귀신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의로운지, 선한 일인지, 악한 일인지 맞는 건가를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절대선에 따른 자유의지로 점점 성숙하면서 그의 희생으로 조선의 사람들을 구원합니다.

박출의 희생이 하얀늑대들의 주인공, 카셀의 희생보다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박출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윤리와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가 가진 아가페적인 사랑이 선함을 지니면서도 소설 속에 보여주는 인간적인 묘사와 불완전한 면모_죄악의 유혹에 흔들리는 약한 모습_을 보여주었으며,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인류의 원죄를 대신해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제물로 바친 어린 양이 되었듯이, 호귀의 끝에서는 박출이 스스로 자신을 희생해서 조선시대 사람들을 악으로부터 구원하는 메시아적인 인물이어서 카셀보다 공감이 갔습니다.

호귀의 박출과 다르게 하얀 늑대들의 카셀은 프로도와 비슷한 주인공이었지만, 윤현승 작가님이 카셀을 자유의지가 없는 꼭두각시로 만들어놓고 작위적인 운명론에 휩쓸리게 만들었습니다. 소설 후반부에 갈수록 주인공의 존재감이 미미해지고, 소설 내내 그는 하얀 늑대들의 분기점의 흐름에서 수동적인 갈대처럼 휩쓸리며, 하늑 초반부터 결말까지 똑같은 고민만 반복하는 모습에 답답했습니다.

윤현승 작가는 군상극의 시점을 즐겨 쓰고 작중의 내러티브를 쓰지만, 등장인물들은 방대한 체스판 위에서 체스 말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윤현승 작가의 캐릭터들은 땅을 딛고 서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교감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작가의 손에 따라 생사가 달렸으며 캐릭터들의 행동은 작가 마음대로 휘둘리지만, 스토리의 우연성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자주 쓰는 바람에 읽는 내내 이해되지 않고 작위적인 인상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호귀 59화에서는 박출이 클라이맥스에서 정신적 성장을 이룬 채, 자신의 원수이자 숙적인 아귀를 물리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영혼의 투쟁_인간의 선과 악을 다룬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박출은 인간의 선을 상징하는 이타심, 사랑과 자비, 자기 희생을 상징하고, 아귀는 인간의 악을 상징하는 이기심, 분노, 탐욕과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우의적인 알레고리로 이해하니 작가님이 말하고 싶은 주제가 뭔지 이해했습니다.

이 좋은 글을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베르메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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