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을 중요시하는 독자로서 ‘당신이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 익히고 가야 할 기본 연표와 개념과 배경 지식’ 따위를 서두에 장황하게 배치해둔 소설들(주로 판타지 SF 장르겠지..)은 때론 커다란 벽처럼 느껴진다.
어서 빨리 조이 패드 붙들고 뭐라도 쏴 죽이고 때려 부수고 싶은데 일단 300페이지에 달하는 매뉴얼 먼저 정독하고 시작하기를 권유하는 게임을 보는 느낌이랄까?
내가 읽고 경험하고 싶은 것은 아무래도 좋을 가상의 역사 연표와 개념과 지리 도표 따위가 아닌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와 흥미로운 인물들이기에 ‘전신보’는 근래의 판타지 소설에 대한 가벼운 혐오증에 걸린 내게 치유와도 같이 다가왔다.
뻔하게 흘러가는 듯 하면서도 매번 반전이 있는 에피소드들과 전형적으로 보이지만 늘 뒤틀린 한 수는 가지고 있는 인물들(나는 특히나 3회의 불곰에게 정이 많이 간다. 제발 살아있기를…)의 조화가 어찌나 절묘한지…
무엇보다 작가의 단어를,문장을,문단을,단락을 절륜한 리듬감으로 쌓아 올리며 한회,한회를 구성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매번 자기 완결성을 띈 에피소드들이 방만하고 종잡을 수 없지만 꾸준히 진행되는 큰 이야기의 지류로 흘러가는 것도 독특한데, 한편으로는 매번 딱 애매모호할 정도로 뒤가 구린 찝찝함을 남기는 것이 얼추 세하라자드의 절단 신공 충만한 이야기 솜씨에 넘어가 인격개조를 당한 옛날 옛적 술탄의 심정이 이해가 될 정도이다.
욕심 많은 독자로서 훌륭한 기교의 전채요리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것도 만족스럽지만 풍성한 주요리에 대한 최소한의 암시라도 이쯤이면 나와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조금은 있다.
(전채 요리가 이 정도라면 주요리는 대체 어느 정도의 수준이란 말인가??)
사실 1부 완결되는 시점에서 ‘아 이런 이야기겠구나!?’ 싶은 나름의 추리를 끝내 놓았더니 더더욱 무슨 이야긴지 모르게 흘러가는 2부에 즐거운 뒤통수 맞고 징징거리는 맥락의 아쉬움 일지도 모르겠다.
뭐 그것도 나름의 흥취는 있을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작가의 훌륭한 글 솜씨에 취할수만 있다면 주요리 따위는 건너뛰고 전채로만 배를 채운다 한들 나쁠것도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