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중세 시기는 수많은 판타지물에서 흔히 차용됩니다. 봉건제, 종교, 농노, 기사, 오등작 같은 요소들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것은 차용 선에서 그치는 편이고, 벨 에포크 시기나 종교개혁 이후의 특징들과 뒤섞여 기묘한 물건들이 양산됩니다.
고증은 둘째치고(애당초 세계관이 현실과 같지 않으니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것이 옳습니다) 문학적 핍진성부터가 지켜지지 않습니다. 설정은 비대한데 서로 잘 묶이지 않고, 이야기가 설정에 움직임이 제약되는 모양이 됩니다.
결국 세계관의 기틀부터가 뒤틀린 채 시작되고, 갈수록 이야기는 균열이 생기고 나사가 빠지게 됩니다. 과격하게 이야기하면 고찰 없이 겉멋만 든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겨울불꽃의 시대’는 분명한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비록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현실의 시대상을 공부하며 반영하고, 세계관 내에서의 개연성을 지키고자 노력하며, 그것을 자기만의 유흥(설정놀음)으로 삼지 않고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그말인즉, 자신이 쌓은 세계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지나치거나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는 겁니다.
본인부터 말하기를 ‘딱히 치밀하게 플롯을 계획해서 쓰지 않고, 인물들에 맞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고 하셨습니다. 어찌보면 엉성하고 어수선한 것이지만, 어찌보면 등장인물을 작가의 도구로서만 쓰지 않고 함께 향유하도록 독자에게 내어 준 셈입니다. 전 이 대목을 사소하면서도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내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작가 본인이 밝혔듯 실제 역사에서 많은 모티브를 가져왔습니다.
봉건제에서 절대왕정으로 넘어가고, 겨울이 길어졌으며, 전쟁에서 비롯된 종교의 폐해가 깊어진 때. 현실로 치환하면 중세 말기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흑사병과 십자군 전쟁, 소빙하기 등으로 인해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암흑시대’의 모습이 많이 나타났던 시기입니다.
이처럼 역사를 밑바탕에 깔고 가는 이야기는 개연성에서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중간하게 이것저것 섞어 붕 뜨기보단 ‘현실’이라는 강한 무게중심을 갖고 가는 것이죠(개인적으로는 아주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역덕으로서도 나름 흐뭇해졌다.. 뭐 그렇습니다.
인물들의 심리에 맞춰 상황을 끌고 간다, 는 점에서 이야기 자체에 몰입하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감정선을 놓쳐 물음표를 잔뜩 띄울 일도 없습니다. 굳이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본을 잘 다져놨으니 따라오는 이득입니다.
하지만 그런가 하면 개인적으로 걸리는 것도 있습니다.
일단 ‘딱히 정해진 플롯은 없다’ 이긴 합니다만, 뭔가 전개가 지지부진합니다.
물론 기본기에 충실하다보면 몸이 무거워지고, 그 탓에 속도가 잘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전 최근에서야 정주행을 끝낸 입장입니다만, 백작령에서의 마녀와의 싸움부터 급격하게 이야기의 밀도가 떨어진다고 느꼈습니다.
독자들이 인물들에게 이입하기 쉽다는 장점을 전술했었습니다만, 이게 오히려 발목을 잡게 됩니다.
인물들은 마녀에 대해 당혹스러워 합니다. 대화도 제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상대는 날 꿰뚫어 보는 듯한데 이쪽은 완전히 무지한 수준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독자도 당혹스럽고 무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독자는 어디까지나 독자이므로, 그저 인물들이 이 상황을 빨리 타개하기만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동안 이야기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집니다.
뭐 최근화에서 상황이 변하기는 했습니다만, 향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꽤나 곤란할 듯 싶습니다. 아마 고민이 필요하겠죠.
제 생각에는 이러한 장단점들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총체적으로는 보기 드물게 기본기가 탄탄한, 말 그대로 정통 판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소설이 첫 작이라고 하시던데, 과연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본기가 있으니 분명 훌륭하게 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상, 개인적으로 기대를 갖고 마무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