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납, 쇠> 공모(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은과 독 (작가: 밀사, 작품정보)
리뷰어: 분홍나비, 19년 12월, 조회 103

은을 빙자하는 납이 즐비하기에, 그것이 은인줄 알았던 소녀는 쇠를 들었다.

쇠의 형태는 매번 달랐다. 낫과 망치부터 깃대까지. 하지만 언제나 쇠의 대척점에는 은이 있었다. 소녀는 은을 오독하여 납을 마시다 죽어갔던 진시황들을 생각했다. 콩키스타도르, 알비파, 데우스 로 볼트, 호모섹슈얼 이즈 신. 그렇기에 소녀의 쇠는 결국 롱기누스의 창. 은색 피를 남김없이 쏟아내길 바라는 로마 병사의 창. 로마의 창. 가이사의 창. 그렇기에 그 창은 결국 가이사의 것이니 인간의 것이다. 따라서 소녀는 은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언제나 더 날카롭게 쇠를 두드릴 뿐이었다. 언젠가 찾아올 하르마게돈의 날을 위하여. 그 날이 오면 은은 추악한 본질을 드러내어 세상 밖으로 쫒겨날 것이라, 소녀는 그리 믿었다.

소녀는 은을 저주했다. 자신에게 은의 순백함과 순결함을 설파했던 이들은 지금까지 모두 싸구려 잡상인들에 불과했다. 누군가는 은식기의 유무가 사람의 됨됨이보다 더 중요하다 하였고, 누군가는 소녀의 가족이 은이 아니라 나무식기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들의 파국을 운운했다. 지금부터 이 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바르면 재물과 성공이, 마시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 소녀에게 은팔이꾼들의 말은 그리 들렸다.

그에 반해, 소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쇠를 사랑했다. 소녀의 혈통에는 쇠를 다루는 이들의 피가 짙게 스며들어 있었기에 어쩌면 그것은 가풍을 이어받은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소녀는 자신이 동레미의 소녀처럼 계시를 받기를 원했다. 그녀는 은, 소녀는 쇠이겠으나.

하지만 소녀는 알지 못했다. 쇠를 만지는 이는 자연스레 그 독이 온 몸에 스민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납 중독과 다르지 않음을. 소녀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소녀는 이미 쇠독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허름한 움막에서 소녀는 정신을 놓아가고 있었다. 눈을 떴을때, 소녀는 자신에게 미음을 먹이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의 손에는 순은으로 만든 수저가 쥐어져 있었다.

소녀는 여자에게 물었다.

나는 당신의 은을 저주하는 자에요. 어찌하여 은으로 나를 내리치지 아니하시고 저를 구해주시나요?

여자가 말했다.

이것이 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소녀는 은을 보았다. 은을 덧씌운 납이 아닌 순은의 위상을 보았다. 은의 순결함과 해독을 보았다. 허나 소녀는 쇠에서 은으로 쉽사리 쥔 것을 바꾸지 아니하였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소녀의 마음에는 일렁인다. 은을 자처한 이들에 의해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소리가. 은으로 도금한 납 해골의 탑을 찬양하는 이들이 보인다.

그것은 이천년 동안 켜켜히 쌓인 촘판틀리. 그것을 신봉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탑이 피의 탑과 다르다고 생각하나 착각일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은과 납을 착각하여 이 땅에 피를 흩뿌렸을까. 그것은 은의 잘못이 아니다. 얼치기 광부와 대장장이의 잘못이다. 하지만 은을 볼때마다 소녀는 그들을 생각했다. 그들에 의해 죽어간 이들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여전히 소녀는 쇠를 손에 쥔다. 은으로는 호미와 괭이와 삽을 만들 수 없기에. 철로 만든 무기 대신 농기구를 손에 쥐며 노동요를 부른다. 하지만 쇠를 쥘 필요가 없는 독방에 들어서면- 그곳에는 아직 제련되지 아니한 은 광석들이 자리잡고 있다. 평생 쇠를 손에 쥐어왔기에, 쇠의 가치를 줄일지언정 차마 버릴 수 없는 소녀였으나, 이제는 조금씩 쇠 대신 은을 두드린다. 독방에는 아무도 쉬이 들려주지 않을 망치질 소리가 나직히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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