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준비하는 자세.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세상이여, 안녕. (작가: fool, 작품정보)
리뷰어: 우연과 상상, 19년 11월, 조회 119

모든 삶은 유한하다. 시간의 영속성 앞에서 결국은 죽음(혹은 소멸)으로 끝이 난다. 여기에 예외란 없다. 인간이라는 종 역시 시한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유한한 존재들이다.

우리에게도 최후가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그 최후가 어떠한지를, 언제 올지를 한 번쯤은 상상해봐야 한다. 소설 <[03:2006] 세상이여, 안녕>은 대담하게도 종말을 거품으로 비유하였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단단한 땅조차 한순간에 사라질 존재로 만든 것이다. 태양풍도 아니고 전염병도 아니며 기계문명의 등장도 아니다. 우주가 거품처럼 꺼진다는데, 별수가 없다. 여기엔 위기를 헤쳐나갈 영웅도 없고 남은 삶을 어떻게든 살아보자, 하며 다독이는 생존자들도 없다. 오직 종말만이 덩그러니 놓였다.

 

*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중략) 세상의 종말이 머지않은 것일 테니까. 이 모든 것이 그 궁극적인 본질―무의미를 드러낼 시간이 마침내 도래한 것일 터였으니까.

허무주의자의 감상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 소설은 화자가 종말을 바라보는 태도를 짐작케 한다. 물리학자로서 거품우주를 발견한 그가 종말을 앞두고 허무함에 빠져버렸다는 해석은 그럴듯하지만 소설은 그보다는 더 깊이있게 나아간다. 허무주의에 빠져 자살하는 물리학자 같은 흔한 설정은 우주 로켓의 추진기관처럼 소설이 대기권을 벗어나면서 저 바다 밑으로 버려버린다. ‘선생님의 부고’가 그러했다.

그 첫 번째 나팔은 선생님의 부고였다. 은퇴하신 뒤로도 늘 즐겁고 활기차셨다는 동문들의 입 모든 회고와, 그럼으로써 지워진, 그러셨던 분이 도대체 왜, 라는 질문 사이에서..

정황상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생님’은 추후 화자의 사색 속에서 다시 등장한다.

모든 것은 종국에는 무의미한 사변으로 빨려나가 버린다. 어쩌면 선생님이 거품 위의 우주를 웃어 넘기셨던 것도 그래서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중략) 그러다가 돌연,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데이터로서 거품 위의 우주의 현실이 육박해 들어왔을 때 그분이 과연 택할 수 있는 길이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었을까.

화자의 은사였던 ‘선생님’의 자살은 명확한 이유가 나오지 않지만 아마 화자의 짐작대로 종말을 앞두고 느낀 복잡한 심경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종말은 곧 소멸을 의미하고 모든 소멸 앞에서 만물은 평등하게 사라진다. 말 그대로 ‘무의미한 사변으로 빨려나가’는 셈이다. 이 극단적인 허무함이야말로 어쩌면 종말이 지니는 공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화자 또한 그렇기에 ‘선생님’의 선택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해했을 뿐, 그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화자가 종말을 대하는 태도는 보다 덜 극적이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굳이 모멸감 속에서 일하지 않고 그냥 편히 놀고먹을 수 있다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이유로 화자는 연구소의 일상에 적응한다. 그리고 그저 일상을 지속할 뿐이다. 이 심리는 자포자기라 하기엔 나름 진지하고 필사의 저항이라 부르기엔 너무 느슨하다. 종말을 앞둔 사람 치고는, 너무나도 ‘일상적’이다.

 

*

 

화자를 포함한 연구소의 학자들은 세 단계를 거쳐 종말을 받아들인다. 첫 번째는 종말을 피하거나, 혹은 유예하고자 하는 저항의 시도다.

나는 박사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 우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중략) 또 다른, 동일하지만 더 오래갈 거품은 없는걸까? 그렇다면 그곳으로 건너갈 방법은 없는걸까?

당연하지만, 그럴 방법은 없었고 물리적인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은 구원을 바란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다중우주간 이동 방식을 가진 외계인들이 지구 상공에 나타나 함께 저 멀리 다른 우주로 가자고 권유하는 모습을 생각해봤다. 좋은 꿈이었다. 좋은 꿈답게 입에는 달고 배에는 썼다.

우주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외계문명이 나타나 지구인들을 구해주길 바라겠지만, 본문에서도 언급되었듯 ‘초광속 이동’은 커녕 ‘초광속 통신’조차 발명하지 못했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들은 다신 내부로 눈을 돌려 인류에 대해 사색하고 자책과 후회, 가정을 내놓는다.

어쩌면 우리는, 캄브리아기 때 살아남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최소한 백악기 말기에라도. 그러면 최소한 지금쯤은 공간을 찢거나 시간을 쪼개거나 어쨌거나 하여간 현재 우주의 시공간을 뚫고 다른 우주로 달아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런 가정이야 말로 소멸 앞에 놓인 만물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어떠한 변화도 가져올 수 없는 가정일 뿐이다. 학자들의 심경이야 어떻든, 종말이라는 예정된 결말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도리 없이 종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

 

 만약 이 이야기가 기승전결을 갖춘 소설이라면, (중략) …눈물과 감동과 깨달음의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각자 트롤이 한 마리씩 살고 있다.

소망충족적 시도를 벗어던지고 화자는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면한다. 그는 종말을 준비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당연히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최후의 심판의 날에’ ‘선택과 판단과 실천만이 그 답이 될 것’이라 여기며 그 동안 ‘일상의 작은 조개껍질들을 줍는’다. 이제 화자에게 남은 것은 종말을 맞이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소설은 마지막에 이르러 화자의 감정을 변환시키고, 아울러 이 모든, 소멸이 가져오는 무의미까지 단숨에 탈바꿈시켜버린다.

단상의 남자는 자신을 유엔 사무총장이라고 소개한다. (중략)

“세상은 이제 한 시간 남았습니다.”(중략)

“우리는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 여기까지 이 모든 것을 이루어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남은지 알지 못하고도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다음 순간, 한 시간 뒤에 이 모든 것이 남김없이 사라진다 해도,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이것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화자가 만일 종말의 순간까지 소망충족적인 태도를 고집하여 구원이나 회한, 허무주의에 빠졌다면, 그는 결코 종말을 바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마지막 순간에 화자가 마주한 현실은 소멸이 무의미를 불러오지 않는다는 새로운 깨달음이다. 우주가 거품처럼 꺼지는 순간, 모든 존재는 동일하게 소멸할 것이고 그 소멸 앞에서 존재의 차이성은 무시된다. 말 그대로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 시간까지 지속해왔던 존재의 역사까지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우리는 소멸하기 위해 살아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서로 공간은 달라도 함께 이 노래들을 같이 듣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이런 노래들, 연주들을 만들어낸 존재들과 같은 종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연구소 시설을 둘러본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평면과 직교를 실현해낸 존재들이야.”

여기까지 도달했음을 돌아보고, 스스로 ‘실패한 인간’이라 칭하는 냉정한 현실 직시 또한 끝까지 놓지 않는다. 대신 그 실패를 껴안고 자랑스럽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일상을 지속한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란 홀가분하게 ‘끝’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과업도, 책임도, 남지 않았다. 모든 일과를 마쳤다. 오직 보상만이 남은 시간이다. 때마침 카운터에서도 ‘황금빛 종소리가 땡! 하고 울린다.’

“해피 아워입니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 맥주 무제한입니다.”

‘해피 아워’라니. 우주 종말의 카운트다운을 ‘해피 아워’라 표현했다. 이토록 대담한 작가가 몇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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