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적지는 이제 죽음 대신 규희였다. 그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한국 SF 어워드 수상 작가 연여름의 첫 번째 단편 소설집 『리시안셔스』가 황금가지에서 출간되었다. 수상작 「리시안셔스」을 비롯, 수상 후보작인 「시금치 소테」 등을 포함하여 서정적이면서도 발랄한 매력이 돋보이는 총 9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작들은 21세기, 변두리에 서 있는 다양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표제작 「리시안셔스」는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던 ‘진’이 같은 사람인 ‘규희’에 의해 반려로서 입양되는 이야기다. 작가는 인간과 반려동물 사이의 일방적인 관계를 사람이 사람을 기르는 세계에 빗대어 동물권의 문제를 다룬다. 해당 작품은 480여 개에 이르는 후보 중 단연 세 손가락 안에 꼽히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바 있으며 구한나리 심사위원장은 심사평을 통해 “SF만이 가능한 현실 비판의 예시 같은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같이 수록되는 「비아 패스파인더」는 장애인과 이민자의 인권 문제를, 「면도」는 존엄사와 입양 문제를, 「오프 더 레코드」는 성 소수자 문제 등을 다루며 현실에 대해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연여름 작가는 성별 중립 대명사를 사용하고, ‘장애’ 대신 ‘장해’, ‘부모’ 대신 ‘보호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등 소설 속의 어휘에서도 소외된 약자들을 배제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입양의 대칭점에 있는 단어가 존재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거리로 되돌려 보낼 거라면 어째서 애초에 입양을 하는 거지?” _ 「리시안셔스」 중
“나는 여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여러 불편을 감수하고 잠시 머물다 간다는 것.” _ 「비아 패스파인더」 중
SNS에서의 특수한 인간관계를 다룬 생활감 넘치는 작품들이 수록된 것도 특징이다. 「표백」에서는 SNS에서 ‘저격’을 듣고 그 보복으로 사이버불링에 가담한 인물이 등장하는 한편, 「가빙 라이트」는 웹소설 작가와 그 팬의 ‘오프라인 만남’ 이야기를 통해 SNS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서 「좀비 보호 구역」에서는 인터넷 언론의 인터뷰에 응해 사이버불링을 당한 주인공을, 오히려 팬 커뮤니티에서 만난 ‘오타쿠’ 지인이 응원을 하는 다각적인 모습을 묘사하며 21세기의 인간관계의 감수성을 포착한다.
“수림의 구독자는 이제 만 삼천이었다. 그러나 그 숫자가 오롯이 팬이 아님을 모두가 안다. 숫자가 늘어난 만큼 비난의 꼬리도 길었다.” _ 「표백」 중
“온라인 인간관계에서 서로에 대해 얼마나 속속들이 아느냐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숨기는 악의가 있느냐 없느냐 정도만 대충 파악만 할 수 있다면, 취미 생활을 함께하는 트친과의 만남은 즐거운 일탈이 될 것 같았다.” _ 「가빙 라이트」 중
- 리시안셔스
대오염이 일어난 이후, 황폐해진 지구에서 사람은 몸을 인공 신체로 교체할 수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미등록’으로 나뉜다. 미등록들은 짧은 삶 동안 내내 병을 앓으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 이러한 삶에 지친 ‘진’은 스스로의 생명을 종료하기로 결심하다가, ‘규희’라는 인간으로부터 구원받는다. 반려인으로 선택된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한 삶, ‘진’에게 미등록 시절 알던 지인인 ‘A11’이 등장하면서 이 평화는 깨진다.
- 시금치 소테
아이를 잃고 수차례 자해와 자살 시도를 반복하던 미하는 부정적 기억의 연결고리를 끊는 ‘옵션’이라는 치료를 권유받는다. 그즈음 자살생존자로 분류된 미하에게 보호사 정인이 찾아온다. 예순 남짓의 정인 역시 과거에 자식을 잃고 자살 시도를 했던 경험이 있고, ‘옵션’ 치료를 받았다는 얘기에 미하는 조금씩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어낸다. 2019 SF 어워드 수상 후보작. 황금가지 단편집 『나와 밍들의 세계』 수록.
- 가빙 라이트
‘가빈’에게는 숨겨진 초능력이 있다. 바로 손에서 열과 빛을 낼 수 있는 것. 아주 사소한 초능력이지만, 대한민국이 모두 정전된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지금, 가빈의 능력만큼 유용한 능력은 없다. 좋아하는 웹소설 작가인 ‘폰데링’의 시골집에 놀러갔다가 변을 당한 가빈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변기를 녹이는 것으로 시작으로 마을 곳곳에서 얼어 붙은 수도를 해결한다. 하지만 마을에 도둑이 나타나며 가빈은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
- 좀비 보호 구역
좀비 사태가 터진 이후, 재도약을 준비하는 대한민국. 좀비에 걸린 사람들을 되돌릴 수 있는 치료제까지 나온다. 주인공, 유월은 그 치료제의 성능을 알아 보는 임상 실험 연구자로 꼽힌다. 전 좀비였던 차지민과의 면담을 통해, 지민의 사회성이 어디까지 회복되었는지 데이터를 수집해 달라는 것. 차지민과 유월 사이의 인연은 고작해야 같은 드라마를 좋아하는 팬 커뮤니티의 회원이라는 것밖에 없지만, 유월은 그 위험한 요청을 수락한다. 그 이유란 고작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다는 것뿐이다.
- 비아 패스파인더
런던의 ‘패스파인더’라는 펍에서 공연을 하는 뮤지션 소난에게는 비밀이 있다. 바로 고향이 이곳 런던이 아니라, 평행 세계의 런던이라는 것. 소난의 런던에서는 그의 음악이 인기가 없지만, 문 하나 건너의 이 런던에서는 소난의 음악이 단연 최고다. 하지만 범죄 조직의 테러 때문에 ‘패스파인더’가 무너지면서 소난은 공연장을 잃게 생긴 것은 물론,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갈 통로마저 사라지는 위기에 처하는데.
리시안셔스 7
시금치 소테 63
표백 99
제 오류는 아주 심각한 것 같아요 143
가빙 라이트 173
좀비 보호 구역 225
비아 패스파인더 269
면도 321
오프 더 레코드 355
기억과 변화, 떠남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SF 앤솔러지 『나와 밍들의 세계』에 단편「시금치 소테」로 참여. 「리시안셔스」로 2021 SF어워드 중단편 우수상, 「복도에서 기다릴 테니까」로 제8회 한낙원과학소설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