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조금 늦겠어요. 차가 많이 막히네요.
메시지를 확인하고 미하는 휴대폰을 머리맡에 내려놓았다가 도로 쥐었다. 침대에 모로 누운 자세로 ‘천천히 오세요.’ 라고 답장을 보내고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최대한 원에 가까운 자세를 만들면 손과 발이 비슷한 위치에 놓인다. 충전기에서 분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지근한 휴대폰을 핫팩 삼아, 차가운 발바닥에 갖다 대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환절기에는 수족냉증이 늘 말썽이었다.
얼음장 같던 발에 미약한 온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보일러를 올린 지 오 분이 채 안 되었다. 발도 집도 데워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보호사가 늦는다고 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문을 열어주었을 때 냉기 도는 집안으로 첫인상을 꺼낼 뻔했다.
이 모양이 되었어도 여전히 남의 시선을 신경 쓰나.
미하는 오른쪽 발바닥에 붙였던 휴대폰을 왼발로 옮기며 생각했다. 어차피 보호사도 훈훈한 집안 분위기를 바라며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우울증 진단을 받은 미하는 한 달 전 자살 시도를 했고, 자살생존자라는 신분을 달고 어제 병원에서 퇴원했으며, 나라에서는 오늘부로 보호사를 파견했다.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자살생존자 보호사 제도는 몇 해 전부터 나라에서 운영하는 사업으로, 보호자가 없는 자살생존자에게 의무적으로 파견되고 있다. 병명과 정신건강 상태에 따라 파견 기간은 다르지만 기본 1개월에서 6개월 사이가 보통이며, 생존자의 일상을 아이 돌보듯 돕고 변화를 체크한다. 보호사가 2개월간 월수금에 집으로 방문하게 된다고 퇴원할 때 받은 서류 중 하나에서 읽었다. 미하에게는 배우자라는 법적 보호자는 있었지만, 별거 상태로 미국에 있는 그가 와줄 형편은 아니었다. 결국 서명을 했다.
퇴원하는 날 환자 몇 명이 강의실에 모였고 병동에서는 그간 못 보았던 낯선 의사가 들어와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죽으려던 사람에게 이런 교육이 과연 도움이 될까 싶을 만큼 강의 내용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었다. 이 제도가 생겨난 배경과 함께 운영된 후 자살률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성과 보고가 주된 내용이었다. 너희들도 이 통계의 한 축이 되라는 일종의 협박인가? 지루한 통계를 보여주는 그래프와 표가 이어졌고 10분쯤 지나자 약 기운에 그나마 없는 집중력마저 흐트러져갔다. 그때였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부분은, ‘옵션’입니다.”
떨어져 있던 고개를 다시 들게 한 것은 자동차 영업사원에게나 어울릴만한 단어가 들려서였다. 옵션.
“이미 들으신 분도 계시겠지만, 최근 저희 신경-정신건강센터에서는 특정한 기억의 존망을 다루는 연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사실 임상에서는 모두 성공적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저희는 이 프로젝트를 ‘옵션’이라고 부릅니다.”
의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강의실의 모두가 의사를 제대로 응시하고 있었다.
“극단적인 선택은 안타깝게도 재발률이 낮은 편은 아닙니다. 그래서 보호사의 파견 기간이 종료된 후에도 예후가 좋지 않다면, 생존자는 부정적 사고를 유발하는 기억만 선별해 제거할 수 있는 시술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뇌의 시냅스 일부를 차단하는 방법인데요, 말 그대로 옵션인 거죠. 정확하게는 기억 삭제라기 보다는 기억에서 촉발하는 감정의 고리를 끊는다는 표현이 맞겠으나, 더 복잡한 영역은 저희의 몫이고요.”
극단적 선택, 부정적 사고.
의사는 자살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정보를 빠짐없이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뇌의 정보를 판독하는 특허권에 관한 자랑도 절반 섞어서 시술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기억을 인위적으로 만진다는 점에서 학계에서도 우려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범죄나 부작용의 선제적 예방을 위해 생존자에 한하여 그것도 아주 제한적인 영역에서만 시행 중이라는 점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마저도 일각에서는 인간적이지 못한 방법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일부 생존자들에게는 옵션만이 유일한 선택지인 경우를 적지 않게 확인했습니다. 옵션을 선택하신 분들이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도 하니까요.”
“그럼 뭐 하러.”
가장 뒷줄에 앉은 남자가 팔짱을 낀 채로 입을 열었다.
“원하는 사람 지금 당장 시술하면 되지, 보호사 같은 거 보낼 필요 없잖아요.”
“그래도 쉬운 결정은 아니니까요. 옵션이요.”
그런 질문은 벌써 수차례 받아본 듯 의사는 부드럽게 응답했다.
“결정하셔도 즉각 시술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의료진과 충분한 기간을 두고 기억을 선별, 또 선별합니다.”
남자는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저희가 얼마전부터 파견해드리는 보호사들은 모두 옵션을 선택한 분들입니다. 옵션 이후에 새 삶을 살고 계신 분들이지요. 도움이 안 되지는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직접 그분들의 삶을 곁에서 관찰하실 수 있으니까요.”
강의실은 아까와는 다른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모두 자신에게 옵션을 대입하는 장면을 계산하는 중이었으리라. 의사는 침묵이 충분히 흐르게 내버려 둔 뒤 이렇게 말하며 강의를 끝냈다.
“무엇이 인간적인지는 결국 자신이 내리는 정의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