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객실에 도착한 테이는 캐리어를 풀다가 탄식하고 말았다. 수면안대가 없었다.
짐을 챙기면서 분명히 파우치에 잘 넣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쩐지 캐리어 안에 파우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테이는 가벼운 한숨을 한 번 뱉고 난 후 다시 가방을 구석구석 뒤졌다. 꽤 커다란 캐리어였다. 지구에서 칼리스토까지의 여행은 워프를 이용한 편도로도 상당히 긴 구간이었다. 지구의 시간개념 기준으로 꼬박 사십 일이 걸린다.
비록 우주여행은 처음이지만 테이는 그 정도 기간은 지구에서의 일상과 다르지 않게 지낼 수 있다고 자부하며 동면 옵션은 신청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빠르고 간단하게 처리되는 세상인지라 한정된 공간에 사십일이나 갇혀 그 시간을 오롯이 보내는 일이 사실 쉬운 것은 아니었다.
승객들의 대부분은 동면 옵션에 들어간다고 했다. 여행을 예약할 때 항공사 직원이 그렇게 말했다. 깨어있는 승객은 많지 않을 거고 승선 나흘이 지난 후에는 편의시설 운영도 반의반의 반으로 줄어들 거라고 겁 아닌 겁을 주었다. 지구에서의 낮과 밤, 그곳에서 당연히 누리는 자연 발생 산소 속에서 지내는 사십 일과는 엄연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승객들이 잠들어 있는 약 한 달은 꽤 지루하고 고요한 날들의 연속이므로 예민한 승객에게는 여행 자체가 ‘작은’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약 알레르기나 공포증이 있으신 게 아니라면 동면을 추천한다고.
알레르기도 공포증도 없었지만 테이는 옵션을 선택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대체로 혼자 일하는 언어학자 테이에게는 그렇게 보내는 사십 일이 줄 수 있다는 리스크가 별로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 루틴이 틀어지지 않도록 하루의 스케줄을 정해 그대로 살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꾸려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숙면이었다. 아무래도 환경이 바뀌면 잠자기가 쉽지는 않으니까. 잠이 틀어지면 모든 게 틀어진다. 테이는 꿈도 꾸지 않는 질 좋은 수면을 선호한다. 조금은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 년째 매일 사용 중인 수면안대를 일순위로 챙겼는데 그게 캐리어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산더미 같은 짐을 샅샅이 뒤졌지만 역시 없었다.
테이는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다시 뜨고는 객실의 유일한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름 2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둥근 창이었다. 바깥에는 떠나온 푸른 행성이 이제 엄지손톱만 하게 보였다.
객실에 비치된 안내 모니터 쇼핑몰에는 여행 중 필요한 일상용품 카테고리가 있었고 그 중엔 수면안대도 있었지만 사실 효과는 없을 게 분명했다. 몇 년이나 제 손을 타고 제 눈의 굴곡에 맞춰진 그것이기에 의미가 있는 거지, 새 제품에 적응할 무렵이면 우주선은 벌써 칼리스토에 닿았을 것이다.
그래도, 생각하면서 테이는 모니터 오른쪽 하단 구석에 있는 ‘이용 가능한 승무원 호출’ 버튼을 눌렀다. 버튼 옆에 깜빡이고 있는 이름은 ‘미레이’였다.
“구매하신 물품 배송입니다.”
객실 바깥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고 테이는 문을 열었다. ‘미레이’라는 명찰을 단 비슷한 나이대와 키의 여성이 SWV 항공 로고가 인쇄된 필통만 한 상자를 들고 있었다. 유니폼에도 그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밝은 목소리와 표정에 가볍고도 절도 있는 몸짓. 즉 베테랑 승무원의 기운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승무원 역시 이 우주선에 탑승한 승객만큼이나 국적도 인종도 다양한데, 최대한 고객 맞춤으로 통역을 거치지 않아도 될 인력으로 배치해주는 모양이었다. 미레이는 테이와 같은 인종이고 테이의 모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감사합니다. 아, 결제는…….”
테이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까 공항에서 쓰고 남은 잔돈이 있을 것 같았다.
“결제는 칼리스토에서 하차하실 때까지 본선에서 이용하신 금액이 전액 합산되어 익월 네트워크 청구됩니다. 아니면 하차하실 때 C칩으로 결제하셔도 되고요.”
거의 쉬지도 않고 말하는 규정을 들으며 테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미레이라는 승무원이 입고 있는 유니폼에는 현금을 챙길만한 주머니 같은 건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았다. 바지에도 셔츠에도. 무언가를 번거롭게 휴대하고 다니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빈손이 디폴트인 인종으로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세상은 손목에 심은 C칩 하나로 신분인증, 금융거래, 교통, 건강관리 등의 모든 일상이 통하는 세상이니까. 테이처럼 유난히 구식으로 사는 스타일이 아니고서야 미레이같은 모습이 보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볍고 빠르고 똑똑하고.
“그럼,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아…… 네.”
미레이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쯔쯔, 저 남자 촌스러워.’같은 내색은 요만큼도 않고서 산뜻한 표정 그대로 테이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