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올린 이 글의 연장이 되는 큐레이션입니다.
초기 클래식한 좀비 장르서 죽음 자체는 평등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존자가 한두 명이거나 많아봤자 한 그룹 정도였고 나머지 인류는 좀비가 된 경우가 일반적이었거든요. 그때 중요한 건 죽음과 고독감을 극복하고 ‘산 사람’을 만나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좀비 사태에 놓인 개인이 아닌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구체화되며 좀비가 되기 쉬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고, 좀비와 사람의 갈등보다는 그 두 그룹의 갈등을 다루는 이야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작품들에서 좀비, 혹은 좀비병은 사람들에게 같은 무게의 공포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죽음이 평등하지 않듯이요.
좀비 포스트 아포칼립스이자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인 소설 네 작품을 모아봤습니다.
해당 큐레이션을 작성하는 이유가 된 작품이죠. ‘동좀하초’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사람의 시체를 숙주 삼는 버섯으로 섬유를 생산하는 거대 기업 R사의 직원들과 그들이 관리하는 재배실의 좀비들을 구출하러 사옥에 침입하는 유족들의 갈등을 그린 소설입니다. 리뷰서도 적었지만 이미지적으로 독특한 작품입니다.
앞선 작품이 자본주의 하에서 신체의 물화를 다룬다면 위래 작가님의 「지속 가능한 죽음으로부터」는 노동 착취가 주된 이슈입니다. 이 세계서 생존을 위한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몸을 상조회사이자 에너지 생산 기업인 래드캔에 팔아버립니다. 그럼 그들의 정신은 전뇌화 되어 사이버 세상 속에 들어가고, 뇌가 분리된 몸은 좀비가 되어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영원히 쳇바퀴를 타죠. 작가님께서는 휴먼펑크라는 단어로 해당 작품을 설명하셨더라고요. 이런 상황서 ‘좀비를 해방한다’는 목표는 어떤 가치를 지닐까요.
자본의 계급에 따른 죽음과 위험의 불평등을 그려내는 방식을 눈여겨볼 만 한 작품입니다. 극악무도한 가격의 좀비 백신을 맞을 수 없어 감염의 위험에 노출되고 시신마저 소각 처리되는 빈민가와, 반대로 신체의 안전과 편안한 사후를 보장 받는 부촌의 대비는 정석적입니다. 다만 이야기의 전개와 결말은 다소 아쉽습니다. 뭣보다 좀비가 너무 늦게 나와요. 좀비 장르서는 치명적인 단점이죠.
아실 분들은 다 아는 작품입니다. 현실의 경제/지역/신체적 차별을 좀비라는 은유를 통해 다루는 의연한 작품입니다. 좀비가 자아와 자기통제력이 있다면 그들을 좀비로 취급하고 차별할 명분이 있을까요. 어쩌면 좀비라서 차별하는 게 아니라 차별하기 위해 좀비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일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