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괴물들의 전성시대다.
이제 막 작가의 상상 속에서 발아한 신생 괴물부터 좀비처럼 족보 있는 괴물들까지 매체를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장르문학을 사랑하는 입장에선 퍽 반가운 일이지만 이러한 괴물들의 대호황 이면에는 그만큼 짙은 그늘이 져 있기 마련이다. 세상이 그들 외부로 쫒아냈던 혐오스런 타자, 괴물이 다시 등장하는 건 대개 두 가지 경우다. 사회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공동의 적이 필요하거나, 더 이상 그런 미봉책으로는 안정되지 않을 만큼 사회가 불안하거나.
『내 몸을 임대 합니다』는 종교, 이데올로기, 과학.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확실시 되지 않는 이 혼돈의 시대를 대표할 괴물로 신체강탈자를 불러올린다. ‘적과 아군을 구별 할 수 없다’는 신체강탈자의 장르 문법에서 그가 처음 태어나던 1938년과는 다른, 이 시대만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려는 것이다.
1. 고장 난 괴물 탐지기
앞서 말했지만 신체강탈자의 가장 큰 특징은 ‘적과 아군을 구별 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한 번 생각해보라. 아군들 틈에 변장하고 숨어 있는 괴물을 찾아야 하는데 철석같이 믿고 있던 괴물 탐지기가 고장 나 버렸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악취」의 신체강탈자는 주인공인 최설진이 고장 난 괴물 탐지기로 인해 차근차근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즐거워한다. 실로 ‘악취미’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머리카락 한 올만 있어도 몸을 뺏을 수 있으면서 굳이 시체를 조각내 최설진 앞에 전시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16년 동안 공들여 쌓아올린 형사로서의 경험, 예리한 관찰력, CCTV와 부검 기술까지, 최설진이 믿고 신뢰하던 것들을 차례차례 고장 나게 만든다. 적과 아군, 주체와 타자를 칼 같이 판별해 내던 이성과 과학이 쓸모없게 된 것이다.
결국 최설진은 항복을 선언하고 이 혼돈에서 도피하려 하지만, 신체강탈자는 그가 괴물로 착각한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도록 만듦으로서 마지막 남은 보루였던 선과 악의 구분마저 앗아간다. 에필로그에서 최설진의 빼앗긴 몸은 신체강탈자에게 면역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패륜을 저지른 최설진이 더 이상 괴물과 구분되지 않는 타자의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악취미를 가진 괴물이 신체뿐만 아니라 주체로서의 정체성마저 강탈해 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악취」의 신체강탈자는 『내 몸을 임대 합니다』의 다른 신체강탈자들에 비하면 꽤 자비로운 편에 속한다. 「악취」의 신체강탈자는 최설진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남겨 두지 않았던가. 그게 누구인지 판별할 순 없지만 ‘나’를 노리는 ‘적’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확신 말이다.
그렇다면 「믿습니까」의 신체강탈자는 어떨까?
사실 그는 「악취」의 신체강탈자와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점잖아 보인다. 누구처럼 주인공을 졸졸 따라다니며 그가 망해 가는 걸 즐겁게 지켜보는 괴물과 달리, 그는 지구를 멸망에서 구원하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믿습니까」의 세상에 멸망이 도래 한 것은 신체강탈자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기술력 때문이다.
첨단 과학을 힘입어 쏘아올린 로켓이 통제에서 벗어난 탓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인간들이 하는 일이라곤 평소처럼 정시퇴근하기, 서울이 아니라 장모님이 사는 지방에 추락한다고 몰래 기뻐하기, 큰일은 없을 거라며 외면하기 정도다. 결국 모두가 외면한 작은 마을을 구원한 건 정부도, 나사도 아닌 낯선 괴물. 그러니까 신체강탈자다.
그가 이 일로 일약 구세주로 등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는 인간과 과학문명이 포기하고 방관했던 세상을 지킴으로서 주체와 타자의 위치를 단숨에 전복해 버린 것이다. 「믿습니까」는 스스로 이성적이라 자신하지만 누구보다 야만적으로 구는 주인공 현호를 통해 괴물 탐지기를 망가뜨린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성매매를 하던 그가 신체강탈자의 숙주가 되고 나서 아내와 아이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모습은 세례 받고 ‘거듭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독자 역시 인간이니 벌레 소리는 징그럽고 신체강탈 장면은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난 후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적’에게 기만당했다는 배신감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그의 예언처럼 세상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멸망의 위기 앞에서 ‘또다. 인간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지만, 굳이 이렇게 규모 큰 문제를 다시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 싶다.’라던 현호의 말을 돌이켜보자. 어쩌면 지구 입장에서 박멸해야 할 괴물은 인간이고, 신체강탈자가 인간을 없애는 건 그의 첫 등장처럼 ‘세상을 구하기 위한’ 메시아로서의 사명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믿습니까」는 우리를 마치 소설 속 광신도처럼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불확실함 속에 머물도록 만든다.
어찌 보면 「믿습니까」의 신체강탈자는 소설 속 인물들과 독자들의 괴물 탐지기를 고장 내다 못해, ‘적’이 존재한다는 확신까지 빼앗는다는 점에서 「악취」의 신체강탈자보다 성격이 나쁘다.
2. 지워지고 바꿔치기 당한 이름표
자, 이렇게 괴물 탐지기가 망가지고나자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나’는 ‘나 아닌 것’인 괴물을 보며 내가 누군지 확인해왔더랬다. 그런데 탐지기가 망가지는 바람에 괴물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이젠 도무지 내가 누군지 확인할 길이 없어진 것이다! 서둘러 가슴팍을 살펴봐도 남은 것은 이미 지워졌거나 누군가 바꿔치기 해놓은 텅 빈 이름표뿐이다.
「자애의 빛」에서는 『내 몸을 임대 합니다』의 그 어떤 괴물보다도 약삭빠르게 선과 악의 이름표를 바꿔단 신체강탈자가 등장한다. 「자애의 빛」의 주인공 ‘나’는 콜드 슬립에서 해동된 후 낯설게 변해버린 누나를 관찰하며 혼란에 빠진다. 괴물로 변하고 나면 보통 무감정해지거나 포악해지거나 하는데, 독특하게도 누나는 지독한 이타주의자로 변해버린 것이다.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철저히 다스리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누나의 모습은 차라리 신성하게 느껴지기 까지 한다. 그래서 ‘나’는 누나가 ‘인간 아닌 것’이 되었으며 사람들을 이타적으로 전염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누나를 감히 괴물이라 부르지 못한다. 아무리 봐도 누나가 ‘나’보다 훨씬 더 도덕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다.
자, 생각해 보라. 내가 세상을 선의로 가득 찬 낙원으로 만들고 싶다는 누나의 계획을 막는다 치자. 그러고 나면 이제 누가 ‘선’이고 누가 ‘악’으로 보이겠는가? 혼란에 빠진 ‘나’는 결국 누나의 자아가 ‘누나’가 맞다면 안고 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도대체 무엇으로 괴물과 확실히 구분되는 누나의 자아를 증명한단 말인가? 육체가 바뀌었다지만 기억과 마음이 누나인데 그걸 괴물이라 할 수 있는가? 육체가 바뀌기 전에도 누나는 이미 기억이 온전하지 않았는데 기억에 이상이 있다 해서 괴물이라 할 수 있는가?
결국 ‘나’는 가족애에서 답을 구하려 하지만 누나가 보여준 뒤틀린 사랑방식은 그것마저도 자아를 확인 해 줄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닫게 할 뿐이다.
이처럼 「자애의 빛」은 차근차근 ‘나’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며 ‘적과 아군을 구별할 수 없’는 신체강탈자 장르 문법의 지경을 확장해나간다. 이제 신체강탈자는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지워버리면서 ‘나’의 자아마저 확신할 수 없는 새로운 혼란 속으로 독자를 이끌어 가기 시작한다.
한편 「맑시스트」의 신체강탈자는 소장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시스템 그 자체로, 그는 주인공인 유소유와 독자들에게 ‘자아’란 곧 ‘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괴물이다.
「맑시스트」의 배경은 지금보다 극단으로 치달은 미래의 자본주의 사회다. 따라서 사람들이 종교와 이데올로기에서 찾지 못한 자아감을 몸에서 찾는 경향이 현실보다 더욱 심화되어 나타나며, 몸은 소유주의 개성, 계급, 자본을 결정하는 육체자산으로 거듭난다.
본래 유소유는 드물게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맑시스트의 사상에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둔 사람이었다. 하지만 노동계급에게 자본주의 세계는 결코 만만치 않은 법. 가난에 패배하고 열심히 일을 하면 ‘내 몸 마련’을 할 수 있다는 소장의 꾐에 넘어간 유소유는 자신의 이름표에 ‘사상’ 대신 ‘몸’을 적어 넣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신념을 배신했다고 언제나 그 대가가 두둑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게도 유소유는 ‘신체강탈자’처럼 타인의 몸에 기거하면서도 절대로 신체를 ‘강탈’할 수 없는 ‘신체임대자’의 신세로 전락해버린다. 강탈한 신체는 괴물의 소유가 되지만 빌린 신체는 매일같이 더 비싸지는 몸에 월세 내기 급급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뿐인가. 링고의 몸을 임대했음에도 관객들의 환호를 받는 건 유소유가 아니라 그의 꼬리다. 소유하지 못한 몸은 ‘나’의 개성도, 계급도, 자본도 대표할 수 없기에 자아감을 주지 못하는데다, 몸 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언제든지 방을 빼줘야 하는 객신세가 바로 유소유의 입장인 것이다.
이처럼 「맑시스트」의 신체강탈자는 ‘몸’이 곧 ‘자아’라고 속삭이면서도 결코 그 몸을 온전히 소유 할 수 없도록 함으로서 ‘자아’를 확신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3. ‘우리’에 대한 두 가지 가능성.
적과 아군, 너와 나를 더 이상 구별 할 수 없다면 이제 가능한 것은 ‘우리’ 뿐이다.
「맑시스트」와 「트루플래닛」은 지금까지 신체강탈자가 보여주지 못했던 그 너머로 상상력을 뻗어 나간다. 「맑시스트」와 「트루플래닛」이 보여주는 ‘우리’의 전망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신체임대자’로 살아가던 유소유는 결국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링고의 몸에서 많은 사람들의 자아와 동숙하게 된다. 이로서 유소유는 ‘나’라는 자아를 잃고 ‘우리’가 된다. 「맑시스트」의 ‘우리’란 주체의 무덤이자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먹잇감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우리’에 대한 전혀 다른 상상력을 보여주는 「트루플래닛」1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트루플래닛」의 주인공 고윤아는 현실세계에선 방구석 폐인이지만 게임 세상에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트루플래닛’ 게임사 측으로부터 신체강탈자를 물리치고 영웅이 될 기회를 얻지만, 머지않아 ‘트루플래닛’이 신체강탈자들과 유저를 착취하여 만들어진 일종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때부터 고윤아는 유소유와 정 반대의 행보를 보인다.
그는 유소유가 버린 ‘맑시스트’적 상상력을 받아들여 신체강탈자와 연대한다. 시스템을 가능하게 만든 에너지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시스템의 부품이 아니라 주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유소유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몸’을 미련 없이 버리고 트리니티 우주의 일부, 즉 ‘우리’가 될 것을 선택한다. 「트루플래닛」에서 ‘우리’란 적과 아군이 없는 낙원이자 주체를 전복할 수 있는 타자연합의 가능성으로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맑시스트」와 「트루플래닛」은 신체강탈자가 도달할 수 있는 양 극단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사함으로서 아직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상상력의 미개척지가 남아 있음을 알린다.
이처럼 인간과 퍽 달라 보이는 괴물들에게도 생로병사는 존재한다. 그들은 시대적 불안과 공포 속에서 태어나 당대의 문제를 성찰하게 하고, 더 이상 그 상상력이 유효하지 않을 때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괴물은 또 다시 그들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찾아오면 멋지게 부활하기 마련이다. 『내 몸을 임대 합니다』는 신체강탈자가 가진 가능성을 여러 방면으로 실험하고 주제의식을 확장시키며 부활의 토대를 차근차근 닦아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괴력난신의 시대에 가장 불편하고, 가장 피하고 싶은 괴물로서 화려하게 귀환할 신체강탈자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 본 리뷰는 제 2회 신체강탈자 문학 공모전 수상작품집 『내 몸을 임대 합니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