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격은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영장류 인간과에 속하는 이들을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더해, 사람이라는 존재의 중요한 특성에 대한 의견들은 가지각색이겠지요. 누군가는, 생각할 줄 알아야 인간이라 말하고 또 누군가는 ‘인간다운 삶’을 언급합니다. 먹고 자고 입는 일에 큰 문제가 없고 스스로 화장실에 가 배변을 처리하는 것. 흔히 인간다운 삶에 포함하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의 뜻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러한 정의가 가끔 무섭도록 슬프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선함과 연대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소설들을 모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모아놓고 보니, 귀신과 부처와 뱀이 사람과 정을 나누는 글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들을 사람이라 칭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사람으로 보아주는 사회적 시선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1 저는 이따금, 사람을 사람으로 볼 때 비로소 그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울고, 아프고, 실패하고, 또 웃고 일어나고 행복한 일을 만들어가는 존재가 사람이고 모든 생명일 테지요. 내 눈앞의, 그리고 내 눈 밖의 사람이 나와 똑같이 그런 삶을 살아내는 사람임을 알고 또 나를 알아달라 손 내밀면서 우리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닐까요. 인간의 물리적 속성을 갖지 못했어도 사람과 연대하고 아픔을 나누어 결국에는 서로를 구하는 다양한 인격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야기 밖에서도 그렇게 사람이 되어가고 싶다고 소망합니다.
<나는 먹는 것>
독특함을 가진 존재로 회사라는 조직에서 살아남기는 참으로 힘듭니다. 그 안에서 멋지게 연대하고 다정하게 교류하는 두 존재의 이야기가, 소재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소금 사탕>
주인공은, 아픈 엄마와 단절을 경험하며 힘겨운 생활을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간 회사마저 어째 평범치 않아 보이는데요,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엄마 그리고 또 다른 이와 셋이 잠시나마 다시 연결되는 전개가 위안이 됩니다.
<해저도시 타코야끼>
‘문어 인간’이 나오는 소설입니다. 소설의 결말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때로는 깨어짐이 회복의 시작일 때가 있지요. 분명한 건, 이야기 속 두 존재는 서로를 만나며 비로소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나 그대에게 자비를 비는 내 손을 주오>
늘 남을 위해 자비를 빌어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위해서는 누가 빌어줄까요? 이러한 질문이 등장하고, 답이 나와 비극 속에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글입니다. 남을 위해 빌어줄 때, 자신도 구할 수 있나 봐요.
<산 너머 저쪽>
사랑이 없는 마을에 사랑을 필요로 하는 소녀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다는 저 산 너머를 향해 떠나는데요, 소녀가 찾은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소녀의 곁에는 누군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