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숭고를 바란다면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손가락 트렁크 (작가: 서리안개, 작품정보)
리뷰어: 소윤, 19년 4월, 조회 53

아직 작품을 읽지 않으셨다면 한 번 읽어보실 이유는 충분합니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들은 툭툭 모여서 스산하면서도 빠르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에 약간의 고저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완전히 이완되는 일은 없이, 독자의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저쪽으로 돌렸다 합니다. 귀신 나올 듯 인적 없는 시골이라는 배경이 너무 익숙해서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배경에서 출발해 조용히 몰아칠 이야기는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요소 몇 가지를 가지고 완전히 새로운 구도의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다고 스포해드리겠습니다.

 

이하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스포일러를 밟지 않고 읽으시는 걸 매우매우 추천합니다.

 

 

 

 

 

 

 

 

 

이야기를 읽을 때 – 픽션 아닌 현실에서도 그래서 문제지만 – 사람들은 피해자의 위치에 선 인물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선한 피해자와 악한 가해자의 프레임은 의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깊이 새겨져 있는 프레임이고 그건 피해자는 다 착해!라는 우김보다는 헷갈리지 않는 선악구도를, 내가 안전하게 연민하고 정을 줄 수 있는 인물과 고민 없이 비난하고 저항할 수 있는 인물을 원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프레임을 충족시켜주는 이야기들이 차고 넘치게 생산되고 소비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손가락 트렁크』 같은 스릴러 단편을 읽을 때 피해자(의 가족)가 유령이 되어 돌아와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모습을 보면서 충분한 쾌감을 느끼고, 선역인 줄 알았던 인물의 악한 면모가 드러날 때 더 큰 불안과 놀람을 느끼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이 두 번째 반전이 밝혀지는 건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서야이지만, 글을 전부 읽은 후에 마음 속에 남은 장면의 흔적을 살피자면 반전 이후의 흔적이 훨씬 크지요. 잘 쓰인 글이라, 반전 이전에도 독자는 충분히 몰입해서 주인공의 스릴을 공유하고 그를 응원하며 이야기를 읽지만 작품을 기억하게 되는 이유는 그 인물에 대한 몰입이 깨지는 경험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반전(유령)이 작품의 비현실적 스릴을 고조시키고 두 번째 반전(살인범)이 독자의 기대를 무너뜨림으로서 감정의 동요를 이끌어냈다면 세 번째 반전은 그 결이 다릅니다. 이 전까지 유지되어온 감각적인 공포심을 이제는 냉소, 혹은 보다 이성적인 공포가 대신합니다. 첫 번째 무서운 포인트는 우리가 그동안 몰입해서 읽어온 장면들이 초자연적 존재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는 깨달음은 그야말로 코즈믹 호러의 영역이지요. 하지만 『손가락 트렁크』의 결말을 장식하는 이 초자연적 존재들은 징그럽거나 거대하거나 압도적이거나 숨막히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가 상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고급스럽고 깔끔한 인상을 주는 직사각형 상자. (중략) 중년 남자 옆으로 딸로 보이는 꼬마가 달라붙었다. 남자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때. 재밌지?”

이전 층위의 이야기에서 공포심은 굳이 구분하자면 감각적인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이지만 동시에 필요한 정보만을 전달하는 간결한 묘사와 긴장감 넘치는 페이스, !를 부르는 반전, 징그럽기까지 한 폭력의 현장감이 촉발시키는 공포였습니다. 하지만 왠 고급진 신사분과 신기한 상자가 등장하고 심지어는 어린 꼬마까지 아빠한테 달라붙는 모습이 나오니 감각적인 긴장감은 급작스럽게 뚝 하고 떨어져버리고, 약간 당황하고 있을 독자에 대고 이 악마들은 방금 전까지 그야말로 생사를 오락가락하며 서로를 상처입히던 인간들의 모습을 관조하고 훌륭한 흥밋거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웬 거대한 고어 괴물들이 나와 “꺌꺌꺌꺌! 사실 세상은 우리가 지배한다!”를 외치는 것보다 훨씬 오묘하고 사실 더 근본적인 공포심을 자극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와중에 두 번째 무서운 포인트는, 이 악마들조차 “인간들은 뉘우치는 것에 서투르잖나”는 말을 내뱉는다는 점이겠지요. 악마의 손에 놀아나는 인간의 하찮음에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심지어 그 구도 속에서도 인간은 선한 피해자가 되지 못합니다. 조종한 것은 초자연적 존재지만 이 끔찍한 악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악한 본성이고, 인간인 우리는 힘의 보호도 도덕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버려진 존재에 불과한 채로 작품의 막이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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