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세유와 이유라를 겨울밤에 만났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큰 일교차와 간간히 비가 오는 지금보다는 말이죠. 따뜻한 차를 호호 불며 이불의 온기에 기대어 읽었다면, 차 맛있었다 하며 가뿐하게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소소하고 평온한 소설입니다.
처음엔 다른 기대를 하고 읽긴 했어요. 순간이동자가 겪을 수 있는 일 중에 능숙하지 않았던 시절에 초점을 맞추면 화장실에서 밖으로 이동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해봤거든요. 그런 이야기들을 더 나누게 될까. 순간이동의 헛점에 대해 파헤치고, 이걸 어떻게 컨트롤해서 어떤 사건에 쓰이게 되는걸까라는 두근거림을 안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렇지 않았죠. 다만 테스트에 대해 설명하고, 테스트를 진행하고, 이유라에게 주목하게 된 까닭이 그저 잔잔하고 조용하게 펼쳐져 있었어요. 이 테스트가 중요한 건 알겠지만 그래서 유라가 특출난 잠재력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서 다음에 나올 사건은 뭔데, 라고 성격 급한 독자는 되물었습니다.
교수님을 만나러 일본에 나타났을 때나 화성에 갔을 때까지도 어떤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어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의 고난 그리고 그걸 해쳐 나가며 성장해가는 영웅의 이야기에 너무 익숙해졌던 모양입니다.
2.
결국 제가 찾던 큰 사건(테스트 중에 실종 된다거나, 유라가 사실 외계인이었다거나 ….)은 없었지만 정세유라는 틀 안에서 싹트고 자라나서 그의 시야를 떠나 화성까지 다녀오는 유라의 이야기는 생각의 여지가 많아서 좋았어요.
바람직한 부모자식 간의 관계 같기도 했습니다.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에 걸맞는 일을 추천해주지만 선택은 끝까지 본인에게 맡긴다던가, 화성으로 떠난 뒤에는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흘러가게 놔두는 점이라던가.
‘나란한 성장’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정세유도 유라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걸 찾고 도우며 분명 한 층 성장했으리라 믿어요. 지구를 벗어나는 상상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한계를 한 겹 벗겨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아주 느리게, 테스트를 진행하다 음식을 먹고 차도 마시고 제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모니터 위를 천천히 거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3.
<마루 밑 아리에티>에 소인인 아리에티가 인간 세상의 물건을 뒷배경으로 지나다니는 장면이 있죠.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쓰는 물건이 저런 무늬였던가, 저런 크기였던가 하며 새삼 놀랐어요. 이 소설에서도 정세유가 제스쳐를 만들어 키노트를 화면에 띄우는 것이라거나 젓가락을 다루는 방법이라던가 우로하수 두보틀을 마신거라던가, 세밀해질만큼 세밀해져서 몇번 읽을 때마다 새로운 장면이 눈에 띄는게 재미있었습니다.
마지막엔 스테들러의 HB연필을 쥐고 고민하기도 하네요
게다가 중간중간 던져주는 “말은 생각의 매개체”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어요. 어떻게 표현해도 생각을 다 표현 할 수 없어 잔여물이 남기 마련이라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기도 했고요.
다른 분의 리뷰에서도 나왔듯 대사에는 어색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만나이를 소개하는데에서 갸웃거렸어요. 한국에서는 누구도 만으로는 몇살이라고 얘기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일본에 교수님을 만나러 갔을 때 초점이 약간 빗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유라가 좌표값에 상관없이 이미지 만으로 순간이동이 가능하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같이 식사를 한 뒤에 책정리를 하는 장면으로 마무리가 되서 유라의 능력이 어떻다는 걸 더 알려줘! 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어요. 유라는 저보다 더 성숙한 모양입니다.
4.
이미 리뷰가 있고, 편집부 추천까지 받은 작품에 어떤 말을 더 해야할지 고민했습니다.
순간이동을 할 수 있고, 고 3이며,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마찰없이 투명 비닐막을 지나듯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유라를 지켜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마찰이 없으니 사건도 없었고, 그렇게 평화롭게 흘러가는 게 딱 저의 겨울밤에 필요한 이야기인 것 같아 그 때 또 읽으러 오겠습니다.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