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증후군: 선택을 미루거나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성향을 이르는 말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끊임없는 고뇌의 결정판으로 자주 회자되곤 한다. 복수를 향한 인간의 정신적 고뇌는 보는 사람마저도 안타깝고 어떻게 될까 가슴 졸이게 만든다.
이미 몇 백년 전의 인물인 햄릿이 이토록 선택에 장애를 겪은 후 세월이 이만큼 흘렀으면 그 후손들은 당연히 이제는 선택 정도는 시원시원하게 할법도 하건만 그렇지도 않다니 아니 오히려 더 스마트해지고 정보가 넘치는 이 시대에 선택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이 참 이상할 따름이다.
지금 우리는 작게는 물건을 고르는 일에서부터 사람과의 처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택 속에서 현명한 선택을 하는 일, 또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가 더 어려워진 시대를 살고 있다. 물건을 예로 들어도 그 종류가 너무 다양해지고 각종 기능과 디자인이 하루가 다르게 계속 발전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선택이란 어렵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들은 놓아야 하니 더더욱 신중해진다. 이걸 선택하면 손해를 보는 거 아닐까? 저걸 선택하면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설혹 사정이 넉넉해서 두 개 다 사버리자, 마음먹었더라도 여전히 아직 선택받지 못한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는 한 또 다른 후회의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이렇듯 후회란 언제고 찾아오게 마련이다. 가지지 못한 것, 가보지 않은 길은 원래 더 매혹적인 법. 그래서 아마 이런 검은 신사가 찾아오게 되는 모양이다.
이 소설은 선택과 후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판타지임에도 판타지 같지 않은 건 개연성과 설득력이 충분하기 때문인 듯하다.
조금 특별한 해결사가 그 선택을 도와주겠다고 나서고 주인공을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읽고 나면 유쾌하다. 통쾌하다. 그래, 적어도 저런 복수 정도는 해야 직성이 풀리지…. 허억, 나에게도 저 해결사가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다.(제1막 제2장)’ 햄릿은 이렇게 외쳤지만 그나마 이 시대의 여성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특히 소설의 주인공 이예나는 말이다.
예나는 애인의 행동에서 바람의 기운을 느낀다. 한번 결정에 뒤돌아보지 않는 성격답게 사실 확인을 위해 신중하기로 마음먹고 흥신소 같은 데를 찾아야 하나 생각했는데 앞에 불쑥 범상치 않은 차림의 신사와 꼬마가 나타난다. 검은색 연미복에 검은 정장 모자, 검은색 지팡이, 또 신사와 똑같은 차림새의 미니어처 같은 꼬마가 길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미 그 차림새부터가 좀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특이함은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옷을 입을 자유는 있으니까. 카페에서 상담을 해주겠다고 하니 따라가 본다.
꼬마가 가져다 준 알 수 없는 메뉴판에는 6가지 선택지가 적혀 있다. 하나하나 다 바람 핀 애인에게 해보고 싶은 복수 항목이다. 가장 믿었던 친구와 바람난 애인에게 가장 처절하게 복수해주는 방법은 뭘까? 당신이라면 어떤 방법을 택할까?
나는 6번을 택하긴 했지만 조금 다른 의미에서다. 예나의 결정도 퍽 마음에 든다. 내가 6번을 선택한 건 착해서가 아니라 귀찮기 때문이다.
자 내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 생각해보자. 얼마 전까지 다정하던 내 애인이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대, 그것도 내 친구랑 발가벗고 속닥거리면서 날 비웃는대, 상상만 해도 열통터지는 일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길길이 날뛸수록 그들의 사랑은 더 불타오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내버려두자는 쪽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지고 불행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은 유통기한이 분명히 있다. 호르몬 작용이니까. 그리고 친한 사람을 배신하고 비밀스러이 쌓아올린 둘만의 사랑은 그 속성상 파멸하게 돼 있다. 그들 속엔 항상 내가 있을 테니까. 결국 둘의 관계가 지옥으로 변하게 돼 있다. 그러니 굳이 내 영혼을 더럽힐 필요가 없다. 일찌감치 내 정신 수양에 힘 쏟는 것이 현명하다. 그런 것들에게 더 이상 내 힘과 에너지, 시간을 쏟고 싶지 않다. 내 두고 보겠어. 너희들이 잘 사는지 어떤지. 그런 강렬한 눈빛만으로도 이미 복수는 충분하…. 다? 몇 십년이 흐르고도 그들이 너무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 그때 흐읍. 맞다. 나 역시 장담은 못하겠다.
나의 경우는 그러하지만 사람마다 6가지 중 다른 걸 선택할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어떤 이는 선택을 못해서 굶어죽었다고도 하고. 제 각각 복수를 하고도 후회를 함으로서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곧바로 혹은 세월이 흘러 혹은 거의 죽을 때가 가까워서. 어쨌든 인간은 후회를 하지 않기란 정말 어려운 존재들인 모양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참 선택을 잘했다. 검은 신사도 놀랄 만큼, 꼬마 신사가 발벗고 나설 만큼.
서두에 햄릿증후군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예나는 햄릿중후군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요리 조리 잘 헤쳐나간다. 그 정도 고민과 망설임이야 신중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일 테고 말이다. 그리고 여기엔 씌어지지 않았지만 이 다음에 벌어질 일들을 상상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몇 십년 후의 우리 후손들은 이제 길에서 검은 신사와 꼬마. 검은 숙녀와 마주치고 이상한 가족이네?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때가 되면 더 많은 선택장애를 겪는 사람들 때문에 더 바빠져서 각자 행동에 나설지도 모르므로 검은 옷을 입은 숙녀와 마주치게 될런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