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년 전부터 이어진 비양심의 아이콘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빈 방 있습니다 (작가: 한켠, 작품정보)
리뷰어: 달바라기, 18년 1월, 조회 141

어릴 적, 교회를 다녔다면 누구나 빈 방을 찾아해매는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를 알고 있고, 또 그 연극에 참여해보지 않았을까요? 전 여렴풋하게 기억이 납니다. 무슨 역할을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요셉과 마리아는 아니었는데, 그럼 아마 매정한 여관 주인이 아니었을까요? 차라리 마리아를 태우던 나귀 역할이 나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

한켠 님의 수려한 문장에 대한 이야기는 더 쓰면 손가락만 아플 뿐이니 ‘부러움에 혼이 빠진다’ 정도로만 쓰고 생략할게요.

전 백석의 작품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교과서에서 읽어본 적이야 있지만, 그 뿐이에요. 그래서 작품 속에 인용된 백석의 문장에 대해서는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네요.

하지만 모태신앙으로 거진 20년을 교회에 다녔던 터라, 성경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생각도 감정도 많아요.

이 작품에선 왠지 신비해보이는 장애를 가진 여학생과 그를 지도하는 기간제 교사가 이야기를 이끕니다.

짧은 이야기지만 마침표가 하나 찍힐 때마다 농담이며 사회문제에 젊은이들의 트렌드까지 담아내고 있어서 읽고나면 이렇게 짧은 이야기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 또 문장이 부러워졌네.

어쨌거나, 핵심은 ‘빈 방 있습니다’에요.

요셉이 노크를 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빈 방 있습니까?”
여관주인이 나와 대답합니다. “없습니다.”, “없어요.”, “아, 없다니까.”

그리고 요셉은 신이 마련해둔 계획대로 마구간으로 마리아를 인도하고 거기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야죠.

거기서 태어나야하는 겁니다.

그게 신의 계획이니까요.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해야 남들을 이해하고 연민하고 공감할 수 있으니까.

어릴 땐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뭔가 이상했어요.

빈 방 하나 만드는 것 쯤은 신에게 아무것도 아닐건데. 마구간에서 태어나나, 허름한 여관에서 태어나나, 가난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신은 0.1그램의 처량함을 더하기 위해 매정한 여관 주인들을 준비해 둔 걸까?

이에 대해선 많은 대화가 가능하겠죠. 이 방면에선 ‘악의 문제’가 유명하죠. 여기선 하지만 중요하진 않으니 패스.

‘불행 포르노’라는 말이 있죠. 타인의 불행을 보며 안도하거나, 특히 누군가가 불행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걸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그런 이야기에선 불행은 좋거나 나쁘거나 플롯을 위한 도구죠.

나이를 먹은 제게 여관 주인의 존재는 그렇게 보였어요. 요셉과 마리아의 신실함과 예수 탄생의 극적효과를 위해 준비된 비양심.

‘빈 방 있습니까’라는 연극을 보며 매정한 여관주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얼마나 있을까요? 신이 저들에게서 의도적으로 양심을 앗아가지 않았다면,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예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왜 2천 년 동안 신에 의해 계획적으로 양심을 박탈 당했을지도 모를 여관 주인들에게 동정을 품어 본 적이 없을까요?

아마 작가 님이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겠지만, 전 이 작품을 읽으며 여관 주인들이 양심을 돌려받을 때가 오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선’은 그 자체로 ‘선’이에요. 거기에 비극이 0.01나노그램 더해진다고 그 의미가 더 짙어지지도 옅어지지도 않아요. 물론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얘기는 언제나 성립하겠죠.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무의미한 비극을 더하기 위해 소비된 존재들이에요.

그 당시 여관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오늘날의 건물주 같은 존재였을까요? 예루살렘으로 남자아기들을 모을 때였으니 성수기였을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결코 부유한 자들은 아니었을거라 생각해요.

이야기 속에서 오스카는 ‘나’에게 왜 요셉과 마리아게 여관에서 문전박대를 당해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음에도, 무대에서 ‘빈 방 있습니다’를 외쳐요.

왜 그랬을까요? 저도 모르죠. 이 작품 속에서 오스카의 생각만큼 읽기 어려운 건 없으니까요.

저는 오스카가 여관주인이라는 성경 속 소비적 존재에 무대에서 의미 없이 소비될 뿐인 자기 자신을 투영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리고 오스카는 대본에 짜여진 비양심이 아닌, 아직 빼앗기지 않은 양심으로 ‘빈 방 있습니다’를 외친거라 생각해요.

그렇다면 짜여진 대본으로 그 양심을 앗으려한 건 누구일까요? 신? 그건 2천 년 전이죠.

바로 성숙한 어른들과 조숙한 아이들이에요. 그 누구도, 계획된 비양심에 대한 동정이 없었어요. 누구도 2천 년동안 비양심의 상징이 되어온 여관주인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죠.

오스카에게 암묵적으로 F등급이라는 태그를 달고 무시해온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오스카의 외침에 흥분을 느꼈습니다.

오스카는 2천 년 동안 무시받던 존재들에게 자기의 양심을 부여했어요. 진심 어린 양심이었죠. 그동안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었어요.

우리는 언제까지 누구에 의해선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미리 짜여진 가치관을 따라 움직이고 타인을 판단해야 할까요?

만약 예수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면, 그때도 빈 방을 찾지 못해 시골의 농기구 창고에서 태어날까요?

너무 오래된 생각일지도 몰라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르죠.

회사에서 노트패드를 하나 슬쩍 가져온 사람의 창고일 수도 있고, ‘빅이슈’ 판매자들의 눈빛을 무시한 사람의 안방일 수도 있고, 추위를 피해 편의점에 들어온 고양이를 내쫓은 알바의 단칸방일 수도 있어요.

어쨌거나.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어야 해요.2천 년 전의 여관 주인이게도, 발음 못하는 고집쟁이 오스카에게도, 언젠가 양심에 눈감아 본 적이 있는 당신과 나에게도.

신은 우리보다 더 자비로울테니까요.

추측이지만, 아마 작가 님이 의도하신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감상이라고 생각해요. 부디 그러려니하는 아량을 배풀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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