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 진수는 추자도에서 발굴 작업 중입니다. 옆에는 그가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것으로 짐작되는 후배 아영이 같이 일하고 있고요. 현장에서 발굴된 것 중 편지가 일곱 통 있는데 한글로 쓰여졌고 아영이 이를 현대어로 번역하고 있고요. 편지 내용은 귀양 간 남편을 향한 아내의 사랑입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의 시대였겠고, 남편은 이 추자도에서 유배생활했고, 그러니 남편 입장에서 받은 편지만 남아있을 뿐 남편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는 없고요. 진수와 아영 남녀주인공은 이 옛날 편지를 중요하게 읽고 둘의 대화는 주로 이 편지에 대한 감상입니다. 한샘 작가님의 [그들이 발굴해낸 일곱 가지 사랑 이야기]의 도입부입니다. 소설을 먼저 읽고 리뷰 공모글을 읽은 게 아니라 리뷰 공모 글에 흥미를 느껴서 소설을 읽었습니다. 비판해달라 내용도 내용이겠지만 작가 본인의 원하는 바를 그렇게 자세하고 적극적으로 적어놓은 공모글은 브릿G에서 별로 못봤기 때문이에요.
처음 떠오른 건 홍콩영화 [연지구] 입니다. 너무 예전에 본 영화라 줄거리가 맞나 모르겠습니다만 내용은 대충 이래요. 같은 회사 직원인 주보의를 짝사랑하는 신문기자 만재량은 어느날 광고를 실겠다는 매염방의 방문을 받아요. 고풍스러운 옷차림의 여자인데 광고내용도 이상합니다. 도련님 거기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염방의 정체는 금방 밝혀집니다. 유령이에요. 즉 저승에서 정인을 만나지 못하자 현대 홍콩으로 찾으러 온겁니다. 현대인인 만재량과 주보의는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죽어서도 이렇게까지, 사랑이란 무언가 ….이런저런 깨달음을 얻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연지구]의 주인공은 유령인 매염방이고 [그들이 발굴해낸 일곱 가지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은 남주인 진수입니다.
제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중국 고전문학을 공부했어요. 현대 중국어 사전과 자전, 두 가지 사전을 늘 갖고 다니며 공부를 해야했지요. 또 하나 제가 공부한 분야에는 작가가 없습니다. 당시의 문인들 창작이 아니라 피지배층인 민간에서 창작되었는데 누가 작가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적인 약력을 굳이 리뷰 앞에서 설명하는 이유는,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충돌한 부분이 바로 저의 약력 때문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리뷰에서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말하려고요.
이 소설은 첫번째 편지 현대어 역문으로 시작해 바로 남주인 진수의 반응으로 이야기의 운을 띄워요. 그의 말을 보면,
“잘 모르겠군. 어려워.”
“판독문 말고 뒷장에 현대어역을 봐요, 선배.”
“그걸 보는데도.”
(…)
“이게 첫 번째 편지라고? 현대어역도 뭔가 옛말 스타일이긴 한데…”
남주는 이 정도 고문서도 해석을 못하나? 이게 첫 느낌이었어요. 여주인 아영의 언어능력이 더 뛰어날수도 있고 두 사람이 지금 학부생일 수도 있으니 계속 읽었습니다. 계속 보니 둘은 학부생이 아닙니다. 진수는 고고학자이고 아영은 연구원, 둘은 전문가예요. 게다가 남주는 튀니스 발굴현장 일까지 들어올 정도로 실력자라는 듯이 나옵니다. 아마 아영때문에 튀니스 현장일을 거부하고 추자도로 온 것이겠죠. 남주는 꽤 능력자이고 여주는 그런 능력자 선배인 남주의 말을 경청하는 착한 후배로 나옵니다. 하지만 실력 있는 선배인 남주는 한글로 쓰여진 고문서도 해석을 못합니다. 국문학도가 아니니 못할 수도 있지 않는가? 모르겠어요, 전공이 달라서인지. 그럼 저 분야는 문자 발명 이후 시기의 유물을 발견해도 전문가가 현장에서 해석능력자를 불러 해석을 맡겨야 내용 파악을 할 수 있나요? 예산이나 시간을 따져봐도 본인이 해석하는 게 더 빠를 텐데요. 완벽하게 해석은 못하더라도 대강의 내용파악은요. 게다가 발견된 편지는 일상적인 내용이 주입니다.
예, 해석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걸 수도 있겠지요. 후배와 업무분장을 그렇게 했고 예산을 따내기 위해 좀더 언어 능력자인 여주가 해석을 하는 걸수도 있겠고 아영이 보고서 작성에 떠 뛰어날 수도 있겠고 남주는 좀더 높은 관리직으로서 아영의 진행 상황을 체크하는 역할일 수도 있겠지요. 그럼 남주도 뭔가 일을 해야죠. 튀니스 일 제의 받았다는 말 말고. 남주가 하는 일은 여주한테 뼈해장국 사달라, 편지에 담긴 사랑이 어떻다, 꿈이 어떻다, 고고학이 어떻다, 반달리즘이 어떻다….말만 할 뿐입니다. 이 캐릭터는 짝사랑이란 분위기에 취해 아무것도 하질 않습니다. 일도 안 해요.
남주 캐릭터의 희한한 점은 도입부에서도 나옵니다. 고고학을 통해 주인공의 학문관 나아가 가친관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설명입니다.
“고고학이잖아….”
눈을 살며시 감으며 진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그에게 고고학(考古學)이란 단순히 조사하는 학문이 아닌 한자 그대로 ‘옛날을 생각하는 학문’이다. 그 신념 때문인지 진수는 발굴된 물건이라면 아무리 조그마한 것이라도 온갖 생각을 갖다 붙여 고민에 빠지곤 한다.
남들보다 더 깊이 생각하고 온갖 고민에 기꺼이 빠지고…어찌 보면 외곬수처럼도 보이고 굉장히 사려깊은 성격처럼 이후에도 계속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설명해 독자에게 이해를 돕는 도입부의 이 중요한 그의 신념을 뜯어 보면 “그에게 고고학(考古學)이란 단순히 조사하는 학문이 아닌 한자 그대로 ‘옛날을 생각하는 학문’”입니다. ‘단순히 조사하는 학문’이란 정의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요. 자기 전공을 말하면서. 옛날을 생각하는 학문이란 말도 이상해요. 말 자체는 이상하지 않습니다. 古가 옛날이란 뜻이고 考는 생각하다란 뜻인가요. 考는 아주 곰곰히 생각한다는 의미로, ‘요새 날이 너무 추우니 롱패딩이 생각나네’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능동적으로 파헤쳐서 참된 의미를 규명한다는 의미의 생각입니다. 옛(물건일 수도 있겠고 인간일 수도 있겠고 시간일 수도 있겠고 공간일 수도 있겠지요)을 규명하는 학문. 본인이 한자 그대로라면서 나이브하게 해석을 한데다 ‘단순히 조사하는 학문’ 같은 사족을 앞에 붙여요. 전문가인데. 마치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소설밖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후에도 계속 드러납니다.
“그래. 꿈에 와달라니…. 요즘 세상엔 오글거리는 말이지만 이 당시엔 어땠을까? 얼마나 그립고 보고 싶으면 꿈이라는 요소까지 썼을까? 이들에게 사랑이란 꿈으로도 나눌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그것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하지. 좋지 않은 상황인데도 꿈 꿀 수 있다니! 우리는 오글거린다고 여기지만 이걸 쓴 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표현이었어.”
“요즘 세상엔 오글거리는 말이지만(…) 우리는 오글거린다고 여기지만(…)” 만약 남주가 학부 1학년이나 문외한 대상의 강연에서 하는 말이라면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남주가 같은 동료이자 전문가인 여주한테 하는 말입니다. 같은 전공자 ‘두 사람 간’의 대화인데 남주는 계속 자신의 상상속 요즘 세상이나 우리를 가져와 비교합니다. 마치 두 사람 외에 문외한 투명인간이 한 명 더 존재하는 것처럼요. 남주는 여주한테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저 투명인간한테 계속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아영은 여주가 아니며 로맨스의 한 축도 아니고 계속해서 진수가 떠들 수 있도록 추임새를 넣는 ‘입(口)’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후훗. 선배는 고심하는 모습이 어울리긴 해.
하하, 선배는 진짜 엉뚱해.
그런데 선배. 협회에서 튀니스 현장 보내준다고 했잖아요? 왜 안 갔어요?
발굴된 편지로 그렇게 진지하고 많은 걸 얻는 사람은 선배뿐일걸요?
심각해지는 선배 보는 게 요즘 내 낙이야.
내가 맞춰볼까요? 선배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걸?
이제 좀 사랑이 뭔지 알게 됐나요, 선배?
거의 보살입니다. 다르게 보면 이 아영이란 캐릭터는 남주 입안의 혀처럼 굴고 있어요. 남주가 짝사랑하는 것도 당연하다 싶습니다.
쓰여진 시기도 알 수 없고 누가 썼는지도 알 수 없는 옛 문장을 해석하는 일은, 사전이란 동료와 함께 한 글자 한 글자 짚어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간혹, 문자로 표기된 텍스트에서 인간과 만날 때가 있었습니다. 몇 백년 전 중국인을 지금 여기 한국에서 사는 제가요. 남주 진수는 계속해서 고고학이 어떻고 얼마나 속이 깊고 이제는 죽었을 편지 작성자를 생각하는지 설명하려고 합니다. 편지에 담긴 이 부부의 사랑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감동받고….그는 마치 옛(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소수의 사람중 하나인 것처럼 자신을 설명합니다. 이런 특성이 마치 자신이 짝사랑하고 에둘러 행동하는 이유이지만 자기야 말로 진짜 진국인 것이라 설명하는 것도 같습니다. 마치 좋은 연구자인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이 편지가 언제 쓰여졌을지, 무엇보다 이 편지를 쓴 여자와 받아본 남자가 어떤 인간일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아내는 몇 살일까요? 편지를 밤에 쓸까요 낮에 쓸까요? 어디 살까요? 시부모랑 살까요? 혹시 시부모가 시켜서 억지로 쓴 편지일까요? 남편이 보고 싶어서 종일 울기도 할까요? 아니면 꾹꾹 참다 편지글에만 심정을 토로하는 타입일까요? 아침에 눈을 뜰 때 남편이 더 보고 싶을까요, 잠들기 전 밤의 어둠속에서 남편이 더 보고 싶을까요? 이 사람들은 불타오르던 신혼때 헤어진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십년 이상 해로하며 신뢰를 쌓고 헤어진 사이일까요? 남편은 또 어떨까요? 진수는 계속 두 사람의 사랑을 정의하고 재단하며 판단할 뿐입니다. 심판관입니다. 마치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는 듯이요. 해석도 제대로 못하면서 말이지요.
[그들이 발굴해낸 일곱 가지 사랑 이야기]는 매력적인 소재를 가져온 소설입니다. 우연히 발견된 옛 편지, 거기에 담겨진 사랑, 그 사랑이 시간과 문자를 초월해 현대의 나에게 끼치는 영향, 과거와 현재의 대화, 고립된 섬과 편지라는 상징…..좋은 것들이 많이 얽혀있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소재를 넘어 좋은 이야기가 되려면 좀더 남주는 말을 줄이고 과거의 부부 이야기가 더 구체적이며 드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뼈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지금 이 작품에는 뼈만 있고 피와 살이 없습니다. 뼈 말고도 피와 살까지 있어야 이 부부는 텍스트에서 벗어나 소설 속 진수와 아영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야 말로 이 소설은 로맨스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앞서 밝혔듯이 이 소설을 읽은 계기는 리뷰 공모란에서 작가님이 사장없이 까달라는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원하는 바를 두리둥실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씀하면 리뷰어 입장에서는 리뷰 쓰기가 좀 편합니다. 고려할 범위를 좁혀주니까요. 그러나 여전히 첫번째 난관이 있지요. 독자로서의 난관입니다. 리뷰를 쓰려면 대상 단편소설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 독서 특징은 읽다 마는 소설이 엄청 많다는 점입니다. 출판 소설이나 웹 소설이나 저는 촉이 이상하다 싶음 얼마를 읽던지 덮습니다. 언젠가 지인에게, 작가가 뒷부분에 소중한 보물을 숨겨놓는 스타일일 수도 있으니 끝까지 읽는게 독자의 의무라고 혼난 적이 있습니다. 나란 인간은 인내심이 없는건가 나름 고민을 많이 했고 완독해보려 노력도 딴에는 해봤습니다만 안 되더라고요. 고행도 아니고 완독해야 한다 스트레스만 심해졌어요. 완독을 포기했고, 저는 그냥 그 보물 발굴을 안 하면서, 이런 독서 방식도 있는거지, 살던대로 쭉 살려고요 ( ..) 때문에 제가 브릿G에서 끝까지 읽은 장단편은 첫화(도입부)를 읽은 횟수의 1/5도 안 될 겁니다. 언제나 ‘뒤로’를 눌러요. 하지만 [그들이 발굴해낸 일곱 가지 사랑 이야기]는 끝까지 읽었습니다. 끝까지 읽었으니 잘했다고 해달라는 거냐, 잘난척으로 보일까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는 평생 완독하지 못하고 중도포기가 너무 많은 제 성격에 대한 스트레스가 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에게 왜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지? 질문하는 타입입니다. 저는 편지를 쓴 이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어서 끝까지 본 것 같습니다. [그들이 발굴해낸 일곱 가지 사랑 이야기]가 저를 끌어들인 부분은 헤어져있는 부부, 특히 아내의 몫이었던 것 같아요.
덧.
본문과 상관없는 이야기이나 중도포기를 얘기한 김에 덧붙일까 합니다. 리뷰어를 하면서 타 싸이트 웹소설도 좀 읽었습니다. 읽은 분량이 많지 않은 한계가 있습니다만, 제가 느낀 큰 특색은 하나는 회귀물이 많다이고 다른 하나는 1화에서 꽤 중요한 듯 보이는 사건을 간보기로 보여준 후 과거로 돌아가는 구성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며 처음부터 사건의 복판에 독자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회귀물의 경우, 1화 시작부터 주인공이 죽어서 회귀하거나 아니면 이세계에서 눈을 뜬 주인공의 당황으로 시작합니다. 저는 이게 1화에서 독자를 잡아두려는 웹소설 나름의 특징으로 봅니다. 고전적인 방식이라면 배경과 캐릭터를 먼저 설명한 후 독자를 사건으로 끌어들입니다만 웹소설은 사건을 앞에 배치하고 2화나 3화에서 배경 설명을 합니다. 회귀물이 인기있는 이유중 하나가 이 특성을 적극 활용할 수 있기 구조 때문이라고 보고요. 책은 도서관에서 빌렸든 샀던 책이라는 형태가 있고 초반이 얼마나 지루하던 뒷부분을 먼저 들쳐볼 수도 있고 또 초반 설명이 많아 상대적으로 늘어질 수밖에 없다 예상하고 독서를 시작할 수 있어요. 하지만 웹소설은 다르지요. 언제든 버튼 하나를 눌러 활자 밖으로 나가버릴 수 있습니다. 다음화를 클릭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앞부분에 사건을 배치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독자를 초반(즉 소설에서 가장 지루한 부분)에 묶어두는 방식으로 나온 게 저 구조라고 보거든요.
그럼 브릿G는 어떤가. 제가 느끼기에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 ,저는 얼마만큼 읽었나를 알려주는 상단의 빨간 막대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저처럼 중도포기가 많은 인간에게 상단의 저 빨간색은 앞으로도 엄청 많이 남았다는 걸 계속 알려주면서 더 빨리 포기하게 합니다. 특히 100매 가까운 단편을 읽을 때 이 막대기는 정말 늘어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너는 오지게 더 많이 읽어야한다를 알려줄 뿐입니다. 대신 이 막대기가 위력을 발휘할 때는 약 원고지 25매 안팎의 분량일 때입니다. 관둘까 싶음 이 막대가 엄청 길어져있어요. 좀만 더 읽으면 이번 화가 끝나고 다 읽었다는 만족감도 주고 읽은게 아깝기도 해서 다음화에 더 손이 갑니다. 때문에 저는 꼭 단편이라고 해서 통으로 올릴 필요가 있나란 의문도 가지고 있습니다. 적절히 쪼개서 읽는게 완독하기에 더 좋다는 쪽입니다. 특히 단편이요.
다른 하나는 첫번째를 보완하는 성격입니다. 작품소개에 설명이 충분하고 중요한 부분으로 보이는 구절이라도 언급한다면, 작품 소개를 나침반 삼아 계속해서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빨간 막대기의 압박이 있어도 저는 작품소개에서 이런저런 내용이 나올거라 이미 납득했고 그 부분에 끌려 독서를 시작했으니 앞부분이 좀 지루해도 참고 계속 읽어나갈 수 있어요. 뒤에 이런저런게 나올거라고 작품소개에서 봤으니까요. 하지만 브릿G의 작품소개는 대부분 간략하지요. 설명을 안 합니다. 줄거리를 살짝 알려주면서도 흥미를 끌 수 있게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거라고 봅니다만, 독자 입장에서는 소설을 끝까지 읽어나갈 등대가 없는 느낌입니다.
어쩌다 보니 리뷰에 대상 작품인 [그들이 발굴해낸 일곱 가지 사랑 이야기]와 상관없는 다른 이야기까지 덧붙이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