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풍은 파동함수입니다. 감상

대상작품: 신단수(神壇樹) (작가: 슬픈거북이, 작품정보)
리뷰어: 영원한밤, 1시간 전, 조회 16

본 리뷰는 최대한 스포일러는 배제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브릿G에서 글을 쓰나요.

상업적 웹소설의 문법을 따르기에는 조금 더 클래식하고, 그렇다고 순문학을 쓰는 것은 아니며, 익숙한 장르의 문법 안에서도 나름의 변주를 시도하고 싶어서 이곳에 오지 않으셨을까요. 웹소설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출판 시장은 오히려 어려워지고 있고, 장르문학을 꾸준히 읽고 쓰는 사람들의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에 브릿G는 출판 장르문학을 온라인에서 읽고 쓰고 이야기할 수 있는 드문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작품을 올리는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글을 쓰고 있다보니 반응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압니다. 하물며 리뷰를 공모했다는 것은 그만큼 독자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한발 늦었지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읽은 흔적을 남겨보려 합니다. 무협을 과학의 언어로 새롭게 버무린 이 기묘하고 유쾌한 작품을 조심스럽게 소개해 봅니다.


1. 도술 — 과학의 언어로 번역된 무협

작품의 장르 분류는 SF와 무협입니다. 함께 하기 힘든 두 단어가 붙었습니다. 리뷰를 쓰기 위해서 브릿G 작품에서 ‘무협’장르로 검색을 해봤더니 150여개의 작품이 나오고, 그 중에서 ‘SF’가 붙은 작품은 12편이었습니다. 12편 중 10편이 중단편이었습니다. 연재작 중에서는 본작과 다른 작품 하나가 브릿G에 있는 SF와 무협 조합으로는 유이한 셈인데, 아쉽게도 다른 하나는 23년 연재를 마지막으로 연재중단 표시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본작은 SF와 무협을 장르로 내세운 브릿G 유일한 완결연재작입니다.

이미 흥미롭지 않나요?

 

본작의 세계관이 어떻게 SF와 무협이 묶였는지 표현해보자면,

‘장풍을 파동함수로 설명하고, 도술을 명령어와 라이브러리로 풀어내며, 신선들의 세계를 현실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데이터 계층으로 바라보는 이야기’

라고나 할까요.

전통적인 무협에서 깨달음과 내공, 심법과 비급으로 설명되던 것들이 이 작품에서는 물리학과 프로그래밍의 언어로 번역됩니다. 주인공 도현 역시 기의 흐름을 느끼거나 자연과 하나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현상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한 원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리를 찾을 수 있다면 같은 결과를 다시 만들 수 있고, 조건을 분석하면 다른 방식으로 응용할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도술을 기적이 아니라 재현 가능한 현상으로 바라봅니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은 무작정 힘을 끌어내지 않습니다. 현상을 분해하고, 필요한 조건을 찾고, 실행 가능한 명령을 구성합니다.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시뮬레이션이라고 가정한 뒤, 그 안에서 현실을 움직이는 규칙을 역으로 추적합니다.

이 지점에서 작품의 과학과 코딩의 용어는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섭니다.

과학을 이용해 도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도술이라 부르던 현상을 오늘날의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설명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무협을 비틀면서도 무협의 신비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익숙한 장르의 개념을 낯선 언어로 다시 바라보게 만듭니다. 비급은 라이브러리가 되고, 진법은 시스템이 되며, 도술은 세상에 입력되는 명령어가 됩니다. 그럼에도 스승과 제자, 도호와 등선, 사문의 역사와 신비로운 세계라는 무협의 뼈대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도술과 과학 가운데 하나만이 진실인 것이 아니라, 같은 세계의 이치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였을 뿐입니다.

 

옆동네 플랫폼 달동네에서 천재 수학자가 무림의 세계로 떨어져 도술을 수학으로 이해해서 단숨에 고수의 반열로 오르거나, 반대로 무림의 고수가 현대로 와서 코딩에 응용하는 이세계물은 스쳐 지나가듯 본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세계에 실제 도사들이 존재하며 도술의 정체가 과학·코드로 밝혀진 세계관?

적어도 저는 처음 봤습니다. :smile:

 


2. 상속 — 건물과 함께 물려받은 세계

주인공 도현이 스승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은 세상의 데이터 소스 코드만이 아니었습니다. 강남 한복판의 건물도 함께 물려받습니다. 

도현은 도술 배우겠냐는 말에 호기심으로 왔지만 진지해지자 학자금 대출을 갚지 못했다고 호소하고, 강남 건물을 준다는 말에는 망설임 없이 예스를 외칩니다. 스승이 등선한 뒤 건물주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지만, 곧 어마어마한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는 현실을 깨닫고 절망합니다. 세상의 비밀을 전수받은 도사가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이 증여세라는 사실은 이 작품이 어떤 분위기인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신선과 영물, 환계와 도술이 등장하는 이야기이지만, 현실의 세금과 대출, 비상장주식과 보험금 역시 결코 사소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환상적인 존재가 주인공을 찾아와 맡는 역할도 재무 문제의 해결입니다.

신비한 영물은 고고한 예언이나 천상의 계시를 전하기보다, 주인공이 처한 세무 문제를 분석하고 재산을 정리합니다. 세계의 이치를 다루는 힘과 현실적인 돈 문제가 한 장면 안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입니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물려받은 것은 단순한 재산과 능력만은 아닙니다.

스승에게는 오래된 과거가 있고, 사문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스승이 떠났다고 해서 그가 맺은 인연과 은원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협에서 제자는 스승의 무공만 물려받지 않습니다. 스승의 이름과 사문, 그가 남긴 책임과 원한까지 함께 이어받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전통적인 무공비급 대신 세계의 소스 코드가 있고, 문파의 장원 대신 강남의 건물과 비상장회사가 있을 뿐입니다.

주인공은 건물을 받기 위해 제자가 되었지만, 건물에 딸려온 것은 세금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사문의 과거와 스승이 남긴 문제, 그리고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될 세계의 권한까지 함께 상속받습니다.

능력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그 능력을 둘러싸고 생긴 책임까지 감당하는 일입니다. 이 작품의 상속은 강남 건물주의 꿈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됩니다.  건물의 소유권을 이전받는 일은 법과 세금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힘과 스승의 잘못, 사문의 과거까지 물려받았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정리해야 할까요.

작품은 이 무거운 질문을 지나치게 진지한 표정으로 꺼내지 않습니다. 도현은 여전히 카드값을 걱정하고, 자신의 재산 가치 하락을 슬퍼하며, 상황이 급박해도 손익을 계산합니다. 

작가님은 현실에서 어떻게 편법적으로 회사를 증여받는지 실 사례에서 착안했다고 밝혔습니다. 일종의 현실 풍자로 도입된 상속이라는 소재는 거대한 세계관과 현실적인 유머를 이어주는 역할도 겸합니다.

 


 

3. 도현 — 속물적인 물리학도의 도사 입문기

이 작품의 설정만큼이나 독특한 주인공입니다. 도현은 정의감으로 가득 찬 협객도,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자도 아닙니다. 

도현은 돈에 흔들리고, 학벌에 자부심을 느끼며, 강남 건물과 세금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엉뚱한 허세를 부리고, 위기 앞에서조차 현실적인 계산을 멈추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상당히 속물적인데, 밉지 않습니다. 이 속물성이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거대한 세계의 비밀 앞에서도 인간적인 감각을 잃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소스 코드를 전수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초연한 현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능력이 생겨도 여전히 학자금 대출과 세금을 걱정하고, 건물의 가치가 떨어지면 낙담합니다. 그 솔직한 반응이 도현을 인간적으로 만듭니다.

 

또한 그럼에도 주인공은 주인공입니다.

도현은 개그 캐릭터에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이 배운 물리학과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실제로 도술에 적용합니다. 기존의 도사들이 오랫동안 익혀온 방식에 그대로 따르기보다, 현상을 분석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명령어를 찾아냅니다.

무언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그것이 왜 가능한지 생각합니다. 선배들이 농담처럼 내놓은 과제 앞에서도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기보다는 조건을 분해하고 재현 방법을 찾습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도 단순히 더 강한 힘으로 맞서는 대신, 상대가 사용하는 시스템과 권능이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지를 살핍니다. 물리학도라는 설정이 인물의 장식으로만 소비되지 않습니다.

 


과학의 언어로 치환된 도술.

강남 건물과 함께 물려받은 사문의 책임.

그리고 그 거창한 상속 앞에서도 세금부터 걱정하는 서울대 물리학도가 있습니다.

 

장풍이 파동함수라는 첫 에피소드 제목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도술 트레이닝을 위해 하버드로 향하는 물리학도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면, 

이 기묘한 사문의 문을 한 번 두드려 보셔도 좋겠습니다.

 

작가님의 의지에 따라 후속편도 충분히 나올 것 같은 작품.

 

재밌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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