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팬심으로 추가하는 1부 리뷰 공모(감상)

대상작품: 스파크 인 더 애쉬스(Spark in the ashes) (작가: 쿠쵸,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1시간 전, 조회 13

내가 이 소설을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단지 내가 좋아하는 소재 — 판타지, 신화, 신화 속 인물, 그 현대적 재해석 — 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쓰는 소설, 내가 좋아하고 자주 읽는 소설에는 네 가지 메시지 중 하나가 담겨 있다.

존재는 설명되지 않아도 된다.

이해받지 못한 존재에게도 접점은 발견된다.

살아가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진심은 작고 구체적인 것에 담긴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 네 가지를 전부 갖추고 있다. 다만 나는 (좀 머쓱하고 쑥쓰러워서) 이런 메시지를 조금 가벼운 톤으로, 약간 비틀어서 담는 편인데 이 소설의 경우 나는 절대 할 수 없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는 풍경 묘사와 필력으로 전개한다(이건 2부에서도…).

 

[존재는 설명되지 않아도 된다]

헥토르는 평생 ‘설명 가능한 존재’로 살아왔다. 왕가의 혈통, 전장에서의 무공, 신들이 인정한 명예까지. 그의 가치는 언제나 ‘증명된 무언가’였다. 그러니 이 낯선 세계에서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보답’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할 몸으로 집안일을 도우려 하고, 트로이아로 돌아갈 돈을 모으는 틈틈이 나탈리의 정원을 돌보며, 자신이 받은 것을 어떻게든 돌려주려 애쓴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무언가로 정당화되지 않으면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믿는다.

이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 이 소설의 정서적 핵심이다. 에미르는 헥토르에게 말한다.

“작은 태양아, 너는 내게 어떤 증명도 할 필요가 없다. 이 집의 누구도 네게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헥토르가 지금껏 알던 세계에서 존재란 언제나 무언가에 값을 매겨야 하는 것이었다.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전장에서 흘린 피의 양으로, 이름에 새겨진 명예로. 그런 그에게 “그저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낯선 언어다. 그럼에도 그는 그 말 앞에서 무너져 운다. 머리는 이해하지 못해도, 몸은 이미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받지 못한 존재에게도 접점은 발견된다]

헥토르와 에미르는 서로의 언어도, 서로가 겪은 상실의 구체적 내용도 알지 못한다. 헥토르는 삼천 년 전 트로이아의 왕자이고, 에미르는 고향을 잃고 이 낯선 땅에 뿌리내린 이민자다. 둘 사이에는 설명될 수 있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말(馬)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에미르와, 평생 말이 끄는 전차와 함께 살아온 헥토르. 자살을 시도하려던 노인을 필사적으로 막아서는 아이. 그 순간에도 헥토르는 에미르가 왜 그렇게까지 절망했는지 전부 알지 못했고, 에미르 역시 이 손자의 눈에 서린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둘은 접점을 가진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슬픔의 무게를 알아보는 감각이 그 접점이다.

그 접점이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말 조각이다. 말을 혐오하던 에미르가, 헥토르 몰래 “For Hektor”라 새긴 상자 안에 말 조각들을 채워 넣었다는 사실.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행위로 전해지는 이해다. 두 사람은 끝내 서로의 과거를 온전히 알지는 못한 채로 헤어지지만, 그 불완전한 이해만으로도 서로를 살아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살아가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헥토르는 끊임없이 자문한다. 나는 이 낯선 곳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 모든 것을 잃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그는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전까지는 살아갈 수 없다고 믿는 사람처럼 군다. 어두운 방 안에서 무릎을 꿇고 신들에게 수천 번을 물어도, 대답은 오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은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그가 ‘이미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학교에 가고, 목재를 관리하고, 친구 미아에게 바클라바를 나눠주고, 홍수 속에서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아이들을 구하고, 매일 밤 뜨거운 물주머니를 안고 에미르 곁에서 잠든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로도, 그냥 살아가고 있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마 이것이 아닐까. 삶은 이유가 확정된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모르는 채로도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것. 에미르가 남긴 마지막 유언 — “시간을 어떻게 사느냐는 네가 선택할 수 있다” — 은 삶의 목적을 제시하는 말이 아니라, 목적이 없어도 계속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에 가깝다. 1부에서, 헥토르는 여전히 답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진심은 작고 구체적인 것에 담긴다]

이 소설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감정들은 언제나 아주 작은 사물을 통해 전달된다. 뜨거운 차 한 잔, 담요, 낡은 시계, 톱밥 냄새, 이불에서 나는 햇볕 냄새, 나눠 먹는 바클라바 한 조각.
헥토르가 나탈리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산 값싼 머리핀 하나뿐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세상을 가진 것처럼 기뻐하며 울었다.

이 작은 것들의 축적이 결국 거대한 힘(신들의 뜻, 명예, 운명)보다 더 강력하게 헥토르를 붙든다. 그가 생을 포기하지도, 트로이아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붙잡는 것은 웅장한 설득이나 논리가 아니라, 공방에서 나던 나무 냄새, 에미르의 손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촉감, 담요를 안고 소파에서 잠들던 밤들이다.

이 원칙은 소설의 문장 그 자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거창한 선언이나 설명 대신, 흙냄새와 빗방울과 매미 소리 같은 사소한 감각의 나열이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진심을 담아낸다. 이런 문장들 앞에서는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을 잠시 멈추고 그저 그 풍경 안에 서 있고 싶어진다. 헥토르에게 슬픔이 예고 없이 스며드는 것도 대개 이런 순간이다. 이불 냄새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부끄러워지는 장면처럼,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사소한 감각이 먼저 마음을 무너뜨린다.

결국 이 소설이 그리는 진심이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놓여지는 것이다. 조각칼로 깎은 말 한 마리, 식지 않도록 챙긴 보온병, 손에 쥐여진 낡은 시계. 그것들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정확하게 사랑을 증언한다.

 

1부의 헥토르는 여전히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여전히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설명되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해도 접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진심이 결국 아주 작고 구체적인 것들 속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워간다. 사라져버린 신들은 끝내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지만, 한 노인의 손에서 깎여 나온 나무 조각 하나가 신들보다 더 확실한 응답이 되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의 네 가지 조건을 이 소설이 전부 채워 넣었다는 것, 거기에 (나는 못하는) 아름다운 풍경 묘사까지 더해졌다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소설을 그저 ‘취향에 맞는 소재’를 넘어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하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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