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웹소설에서 무협보다는 선협이 유행이라고 한다. 오래된 중국 신화 속 신들이 나오고 무슨 경지니 원영경, 대원만이니 하는 낯선 단어들 앞에서 “이거 완전 뉴비는 못 읽는 거 아니야?” 하고 지레 겁먹는 분들 많을 텐데, 나도 그런거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재밌게 읽고 있다. 즉, 진입장벽 걱정 없이 편하게 들어올 수 있는 작품이다. 무협도 선협도 처음이라면 오히려 이 작품으로 입문하는 걸 추천하고 싶다.
줄거리
이야기의 발단은 이러하다. 대장간 공방장이 정체불명의 상인에게 은 50냥이나 주고 검 하나를 산다. 부러져 있는 줄도 모르고. 그런데 이 검… 확실하게 명검은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철을 잘 아는 은겸에게 준다. 문제는 이 손잡이 부분만 남은 신비한 검이 은겸의 손에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검의 이름은 서작(瑞雀). 일만 년 전 도가의 신 태상노군이 팔괘로에서 만든 신물로, 본래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있으며 주인이 나타나면 하나로 합쳐지는 ‘운명’을 타고났다. 서작을 얻자마자 은겸은 정체불명의 자객(수사, 修士)에게 살해당하지만(나중에 나오지만 정말로 이때 죽었다), 죽어서 전 당주 남궁견의 혼을 만난 뒤 기적적으로 되살아난다.
캐릭터 소개
은겸
안경(安慶)의 황씨공방에서 자란 대장장이 출신 주인공. 어릴 적 일월신교의 의식에 쓰인 붉은 머리카락 아이였고(나중에는 “적발마왕”소리도 듣는다), 전 남궁가 당주 남궁견에게 구조되어 성장했다. 남들이 못 듣는 소리(쇠의 미세한 울림부터 사람의 호흡과 관절 소리까지)를 듣는 특이 체질이며, 이 덕분에 무공을 정식으로 배운 적 없이도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읽어내는 독특한 전투 스타일을 갖췄다. 성격은 시종일관 담담하고 무미건조하다. 목숨이 오가는 순간에도 침착한 판단력으로 상황을 계산하고, 스스로도 정도가 심하다 싶을 만큼 자기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훗날 밝혀지는 정체는 “이미 죽은 채로 움직이는 존재”—서작을 완성시키기 위한 운명을 타고난 특별한 인도자다.
서작
태상노군이 팔괘로에서 만든 일만 년 전의 상계 신물. 본래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있으며, 주인이 나타나면 하나로 합쳐지는 운명이 새겨져 있다. 겉보기엔 검이지만 사실상 은겸 전용 AI 비서(…)이자 세계관 설명용 도구(?). 주변 소리를 분석해 위험을 경고하고, 필요할 때는 직접 힘을 빌려주기도 한다. 성격은 텐션이 지나치게 높고 감정 기복이 심해서, 혼자 흥분했다가 혼자 침울해지기를 반복한다.
군오(桾悟) / 학과장
삼백 년 가까이 감숙 지하 유적에서 홀로 천겁을 견뎌 원영경에 오른 수사. 원래는 수사 양성기관의 학과장이었으며, 일월신교의 원류가 되는 조직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각성 직후 은겸의 몸을 강탈해 큰 사건을 일으키지만, 아미파 장문인 희원 사태의 개입으로 다시 서작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후로는 서작의 검집 안에 유폐된 채 은겸과 한 몸처럼 동행하는 ‘동거인’이 된다(나중에는 오른손에…). 초반에는 배은망덕하고 오만한 독설가지만, 학자답게 아는 것이 많고 의외로 예의(?)와 원칙은 지키는 편. 은겸과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어느새 묘한 친밀감이 쌓여가는, 이 작품 최고의 ‘츤데레’ 조연이다. 2부에서는 드디어 원하던대로 상계를 가긴 했는데…
진한 스님 (진한대사)
수사를 사냥하는 파계승. 석장 안에 죽은 자들의 혼을 여러 명 모시고 다니며 이들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겉으로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능글맞은 태도(“나무아미타불, 굽어살피소서”)로 일관하지만, 실은 절세고수급을 넘어서는 엄청난 은둔 실력자다. 전투 중 종종 보여주는 압도적인 무위와 군사·역사 지식에 능한 모습에 동료들도 “혹시 호족이나 무관 가문 출신 아니냐”며 궁금해하지만 본인은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율현
멸문에 가까운 수모를 겪은 사파 계열 장인 조직 ‘만형공방’의 후예. 원래는 산길에서 강도짓(?)을 하다 은겸과 만났다. 열여섯 안팎의 소년으로, 성격이 급하고 입도 거칠지만 기계·꼭두각시 설계에 관해서는 타고난 천재. 은겸에게 대장장이 기술을 배우며 사제 관계로 발전했고, 이후 정식으로 동행하며 서작에게 처음으로 ‘목소리’를 만들어주는 등 극중 기술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황실에 쫓기는 몸이라 신분을 숨기고 다니지만, 특유의 밝음과 엉뚱한 야망(황실 쳐들어가자는 등)으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한다.
남궁소윤
남궁세가 전 당주의 딸이자 월영문 제자. 별호는 ‘남궁멧돼지'(…) 앞뒤 안 가리고 저돌적인 성격에서 붙었다. 알고 보니 신화 속 ‘서왕모’급의 엄청난 영근(靈根)을 타고난 인물로, 수사들 사이에서도 특별 취급을 받는다. 실제로도 사실상 제대로 된 싸움은 거의 소윤이 다 한다. 성격은 시원시원하고 직설적이며, 은겸을 편하게 놀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가장 먼저 몸을 던지는 의리파.
왜 입문작으로 좋은가
이야기는 안경(安慶)이라는 소도시의 대장장이 견습생 은겸이 정체불명의 부러진 명검 ‘서작’을 얻으면서 시작된다. 이 검이 알고 보니 만 년 전 태상노군이 만든 상계의 신물이고, 은겸은 그 조각들을 모아야 하는 운명을 짊어지게 된다. 설정만 보면 거창하지만, 서작이 시도 때도 없이 오버하며 떠들어대는 통에 은겸이 절반도 못 알아듣고 “어, 그런가 봐” 하며 넘어가는 장면이 반복된다. 덕분에 독자도 은겸과 함께 자연스럽게 세계관을 배워나가게 된다. 모르는 게 있어도 전혀 쫄 필요 없다는 뜻이다.
서작은 사실상 ‘검에 탑재된 AI’다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서작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상당히 신선하다. 만 년을 잠들어 있다 깨어난 신물이라는 설정인데, 실제로 하는 역할을 보면 영락없이 은겸 전용 AI 비서다. 주변 소리를 실시간으로 분석해서 위험을 경고해주고, 수사(修士)나 경지 같은 낯선 세계관 개념을 은겸(과 독자)에게 통역·해설해주고, 필요할 때 힘을 빌려주기까지 한다. 게다가 텐션이 지나치게 높아서 혼자 흥분했다 혼자 가라앉았다 하는 통에, 은겸이 “잠깐만, 내가 말할게” 하고 진정시키는 만담이 반복된다.
네이버 웹툰 중에 「나노마신」이라는 무협 웹툰이 있다. 거기서는 미래에서 온 후손이 주인공에게 나노머신 형태의 AI(?)를 주입하고 사라지고, 이후 주인공은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나노머신과의 대화와 지식/능력 습득을 통해 최강자가 되어간다. 이 소설의 서작도 얼개가 비슷하다. 다만 머릿속 목소리가 아니라 손에 쥔 검에서 말을 걸어오고, 은겸 혼자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설정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AI 동반자 성장물’ 또는 ‘설명해주는 상태창’ 구조에 익숙한 독자라면 위화감 없이 바로 몰입할 수 있고, 반대로 이 장르가 처음이라도 서작이 친절하게(너무 친절해서 탈이지만) 다 설명해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담담함이 무기가 되는 서술
이 작품의 가장 독특한 지점은 주인공 1인칭 시점의 서술 톤이다. 그런데 그것이 담담하다 못해 무덤덤, 아니, 무미건조하다. 자기가 칼에 찔리거나, 팔이 잘리거나, 신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순간에도 서술은 한결같이 마치 남 얘기 하듯 건조하다. “아프다. 그리고 달콤하고 향긋하네.” (1화에서 과일 매대에 처박힌 직후) 같은 문장을 보고 있으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이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위기감이 안 산다고 느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무심함이 오히려 이 소설 최대의 재미 포인트다. 심각한 장면이든 웃긴 장면이든 늘 같은 온도로 서술하니(죽어있어서 그런것도 있긴 하다. 가끔은 제대로 못알아들어서 그러기도 한다.), 정작 진지해야 할 순간에 실소가 터진다. 읽다 보면 저절로 “야, 이거 네 일이야! 네 일이라고!” 하고 태클을 걸고 싶어진다. 무협/선협 특유의 비장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이 화법이 훨씬 편하게 읽힐 것이다.
소제목만 봐도 웃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재미는 화별 소제목이다. 각종 밈과 속담, 대중가요나 CM송 가사를 비틀어놓았는데, 아는 사람은 제목만 보고도 피식하게 된다.
:
– 1화 운수 좋은 날 — 현진건의 그 소설.
– 2화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누야샤』의 가영이 밈 대사.
– 14화 소리 가요 소리 가 — 새우깡 CM송 “손이 가요 손이 가” 패러디.
– 19화 말, 달리자 — 크라잉 넛의 노래.
– 20화 난 여긴가 또 어딘 누군가 — 듀스 ‘우리는’의 그 가사 패러디.
– 25화 얼음과 검의 노래 — 『얼음과 불의 노래』 패러디.
– 26화 오만과 비겁 — 『오만과 편견』 패러디.
– 41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 초코파이 CM송.
이 밖에도 원조 밈을 알면 한 번 더 웃게 되는 소제목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본문을 읽기 전부터 웃고 들어가는 셈이니,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할 필요가 전혀 없다.
거대한 신화적 스케일(진짜로 신들이 등장한다. 2부는 상계로 올라가 서유기의 그 저팔계부터 만나고 언급되는 신들의 이름은 봉신연의의 걔내들이다), 탄탄한 무협적 디테일(대장장이 출신 주인공답게 철과 검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진지하다), 그리고 그 위에 얹힌 힘 빠지는 유머 감각까지, 무협과 선협이라는 낯선 장르에 처음 발을 들이는 사람에게 딱 맞는 균형을 갖췄다.
어려운 설정은 주인공도 잘 모르니(정말로 철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 걱정 말고, 무거운 전개는 주인공이 알아서 가볍게 만들어줄 테니 걱정 말고, 일단 1화 제목부터 웃으면서 시작해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