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작품에 대해 어떤 이야기였느냐고 제게 묻는다면, 저는 아마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10부작 이야기를 30분 요약 영상으로 본 기분이 드는 이야기
라고요.
소설의 정말정말 큰 흐름을 쫓자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발단: 외딴 함선에서 아무런 기억도 가지지 않고 홀로 깨어남
전개: 테라-11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자기 정체를 쫓을 단서를 얻음
위기: 크로노스-3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자기 정체를 쫓을 단서를 또 얻음
절정: 이름 모를 행성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은 끝에 자기 정체를 전부 알게 됨
결말: 신이 되어서 시간을 역행시켜 테라-11의 이런저런 일을 없던 일로 만듦
‘이런저런 일’로 축약한 이유는 이걸 다 풀어내면 결국 소설 전체 내용을 다 털어놓는 것이기 때문에…… 극히 큰 흐름만 다루자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자아정체성을 찾으러 여행하고, 그 끝에 찾고 다시 돌아오는 귀환 서사죠.
문제는 행성 하나에서 겪은 일들을 풀어놓으면 그건 그것대로 ‘기승전결’이 나올 만큼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전개, 위기, 절정이 각각 자기만의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각 이야기들은 더 세심하게 다루면 하나의 독립된 단편으로도 다룰 수 있는 내용입니다. 즉, 본 단편은 사실상 단편 3부작 이야기를 합쳐놓은 것이나 다름없단 뜻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분량은 176매 밖에 되지 않습니다. 176매가 단편 하나라고 하면 조금 긴 분량이지만, 단편 세 개라고 하면 조금 애매해지죠. 하나당 60매도 안 되는 분량이니, 전개는 매우 신속하고 압축적일 수밖에 없고, 정보는 쏟아지며, 개별 기승전결과 반전을 가지고 있으니 읽는 입장에선 단편 하나에 ‘반전의 반전의 반전의 반전’을 겪게 됩니다.
아무리 봐도 본 단편의 이야기는 176매에 담아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장편… 500매 경장편이어도 좋으니 그만한 분량이 필요한 이야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감정선의 변화 속도나 전개 속도나 도저히 몰입해가며 쫓아갈 만한 속도가 아니더군요.
더군다나 각 행성을 오가며 하나씩 밝혀지는 정보들… 거기엔 반전도 있었죠. 심지어 밝혀진 반전에는 페이크도 있었습니다. 그게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다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이 모든 건 다 창조주의 계획이었다’라는 식의 진상이 밝혀집니다. 확실히 몰입하면서 읽었다면 화가 났을 법한 반전 흐름이긴 했어요. 지속된 반전에 지치게 한 게 어쩌면 계획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로요.
전반적으로 모든 문장이 오로지 전개만을 바라보고 전개만을 생각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굉장히 자연스럽게 나오지만 짚고 넘어가지 않는 부분들도 많았는데, 이걸 일일이 지적하는 건 굉장히 부차적인 지적이란 느낌이 들더군요. 애당초 분량을 넉넉하게 잡았다면(지금은 ‘타이트하다’라는 말로도 부족한 축약을 위한 축약본에 가까우니까요) 설명 부족의 문제도 해소되지 않았을까 싶고요.
내용에 대해서 조금 얘기해보자면, 스페이스오페라 웹소설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설명 없는 막연한 기술, 행성을 오가는 여행, 몇몇 ‘전형적인’ 구도 등에서 느꼈습니다. 하지만 웹소설이 암만 가독성을 중시해도 축약본에 비할까요. 웹소설도 호흡이 있는데 본 단편은 무호흡 전력질주를 176매까지 쭉 달렸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스톤 본인이 다 허가해줬는데 주인공을 탓하며 감정적으로 격분하는 장면은 여러모로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마더 파트는 너무 설명조에 무어라 의심이나 비판을 섞을 새도 없이 진도를 빼버려서 감상이랄 것도 남지 않았고, 마지막 행성에선 사람이 통나무를 한 손으로 드는데 ‘힘 좀 센 사람이구나’하고 넘겨버리니 상식이 뒤틀리는 느낌이더라고요. 마더 파트야 절대적인 분량의 문제가 크니 차치하더라도, 스톤과 마지막 행성 파트는 좀 더 고민과 연구가 필요하실 듯합니다.
주인공이 사실 기계라는 반전, 모든 건 창조주의 계획이었다는 반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좀 더 적절한 암시와 복선이 있었으면 참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이 역시 절대적인 분량의 문제가 크겠죠. 결국 웬만한 문제는 분량의 문제로 회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176매에 욱여넣은 이야기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야기 자체를 두고 보더라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노인과 동백, 그리고 동족인 마더와 안드로이드. 둘 사이에 주인공의 가치 판단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더라고요. 노인과 동백이야말로 자기 잇속이나 호기심에 의해 ‘자초한’ 행동이잖아요? 주인공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아예 주인공이 ‘추적해서 도착한’ 마더와 안드로이드들에게도 똑같이 죄책감을 가졌어야 하진 않았을까요?
이런 의문을 다 치워두고 주인공이 작은 속죄를 위해 내린 결정에는 일말의 감동이 있긴 했으나…… 그 감동 하나를 위해 176매란 지나치게 축약된 빌드업을 쌓았어야 했느냐란 질문에는 역시 회의적입니다. 마더 파트도 이름 모를 행성 파트도 잘라내고 테라-11의 비극만 다루고 진상 듣고 결정했어도 어색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그리고 그 편이 주인공이든 주조연이든 감정선을 좀 더 세밀하게 다룰 수 있을 테고요)
이 정도의 감상으로 마칠 수 있겠으나, 너무 자잘한 부분들이 있어 잠깐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온점은 3배수(3개, 6개)로 쓰셔야 하고, 오탈자도 검수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반점 사용이 잦은데 굳이 끊을 필요가 없는 문장들이 좀 있었습니다. 문장 호흡도 망가졌는데 전개 호흡도 빨라서 여러모로 삐걱거리더군요.
축약본이 아닌 n부작 이야기로서 접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스페이스오페라 웹소설을 따라가면서도 마무리는 출판장르소설의 것을 따라가는 만큼, ‘충분한 빌드업’이 갖춰졌을 때 결말이 가지는 ‘충분한 파괴력’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그럴 의향이 없으시다면 유감스러운 일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