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요 작가의 작품은 <트윈>, <수능 해킹(공저)> 두 작품을 읽은 상태로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작가에 대해선 신학적인 모티브를 자주 사용하는 SF작가라고 듣긴 했었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읽은 그 두 작품은 그 작풍과 거리가 멀었던 터라 <존재의 대연쇄>를 처음 읽을 때는 초반부터 범람하는 신학과 SF요소에 다소 당혹스러웠다. 물론 처음으로 작가의 진면목을 목격했다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TempleOS를 써본 적도 없고 성경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입장에서는 작품을 제대로 독해하지 못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존재했다.
소설은 ‘2025년 9월 13일 오후, 세계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문장과 함께 시작된다. 이 종말은 주인공 자신이 2005년 9월 13일 새벽에 감전당했던 사건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감전 직후 주인공은 의식불명 상태에서 기이한 꿈을 경험하는데, 그는 사방이 정사각형 타일로 된 공간에서 눈을 뜬다. 그곳에는 젊은 시절의 테리 데이비스가 있다. 데이비스는 어셈블리어에 능통한 프로그래머이자, 신의 계시를 받아 독자적인 컴퓨터 운영체제 ‘TempleOS’를 개발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주인공에게 ‘불변하며 참된 말씀’이라며 세상을 구성하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원리를 설명하고 세계는 640×480 해상도의 16색 그래픽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이후 잠에서 깨지만 그날 이후 주인공은 세계의 본질이 8비트 변형 코모도어 시스템이자 16색 그래픽으로 이루어진(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보이는 건 사탄의 간계이다) ‘튜링 완전’ 세계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꿈에서 본 ‘신성한 격자 공간’을 평생 찾아 헤매게 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존재의 대연쇄>는 테리 데이비스라는 실존 인물의 일화를 끌어들여 종교적 계시, 종말론적 분위기, 컴퓨터 코딩을 섞어 놓은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현실의 복잡한 고통을 8비트, 16색, 코모도어 시스템이라는 극도로 단순화된 디지털 신학으로 환원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성경의 구절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명령어로 격하되거나 혹은 승격된다. 그러나 종말 명령어를 통해 도달한 ‘완전함’은 역설적으로 그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 끔찍한 권태로 귀결된다. 고통이 소거된 자리에 남은 것은 환희가 아니라,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시스템적 불사뿐이다. 주인공이 이 권태를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창조주가 되는데, 마지막 순간 주인공이 만든 인공지능이 주인공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계시’를 경험하는 결말에서 이 소설의 세계관이 마트료시카 인형과 비슷한 형태의 재귀 구조임이 폭로된다. 또한 주인공 역시 상위 차원의 누군가가 실행한 시뮬레이션 속 난쟁이에 불과할 수 있다는 공포를 안긴다. 이는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상위와 하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시뮬레이션의 층위만이 존재한다는 디지털 본래의 뉘앙스를 환기시킨다.
다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건 이러한 원형적 서사 구조가 튜링 완전성과 정지 문제라는 테마까지 형식적으로 완성하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독자로서는 무뎌질 만큼 접해왔기 때문에 시장에서의 평가를 전제한다면 다소 아쉬운 마무리라는 인상이 남는다. 그 점 외에는 흠잡을 곳 없는 빼어난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