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서, 어려운 작품이다. 읽기도 리뷰하기도. ㅎㅎ
[단피몽두(單被蒙頭)]는 인간의 절망과 기록의 욕망이 결합해 만들어낸 ‘신화적 공포’, 더 나아가서 ‘스페이스 호러’, 특히 ‘알지 못하는 것이 주는 우주적 공포’의 구조를 ‘한국적 전통’을 배경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했다고 본다.
작품의 주된 특성은 공포 서사 아래에서 신화의 생성 원리를 해부하고, 기록이라는 행위를 ‘신’을 창조하는 행위와 관련지어 재해석한다는 점에 있다. 기록이랑 신화라니, 이거 너무 내 취향이잖아. 그래서 리뷰를 작성해보았다.
작가는 “썩은 바람이 드는 곳”, “사락거림”, “젖은 천”과 같이 냄새·촉각·소리 등 전설의 고향급 공포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음향효과’를 이미지화 시켰다. 특히 ‘사락~사락~’이라는 의성어는 아이들의 노래를 포함하여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 의성어 자체는 소설의 하이라이트에 도달할때까지는 독자에게 마치 천이 끌리는 소리라고 착각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그 소리는 수백개의 얼굴이 만들어내는 숨소리였다(초반부에 힌트를 주기는 한다). 또한 이 의성어는 부패, 신앙, 기록의 불길한 생명력을 동시에 상징한다.
묘사는 공포소설보다는 공포영화 시나리오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초반부터 거의 마지막 절정부분까지도 공포를 유발하는 것들은 시각보다 청각과 촉각에 집중되어 있다. 반대로 괴물이 깨어난 순간부터는 거의 모든 것이 괴물과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표현, 즉 시각으로 나타난다. 대다수의 공포영화가 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내는 촉각이나 소리, 무서운 배경음악을 통해 공포를 유발하고, 마지막에 가서야 그 실체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과 동일하다.
문체 자체 또한 일종의 무당의 제의처럼 느껴진다. 문장이 반복되고 리듬이 느려질수록 독자는 치서가 되어 이 알 수 없는 마을의 의식에 참여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된다.
[단피몽두]는 ‘창세-타락-봉인-재생’이라는 원형적 신화, 특히 샤머니즘적 구조를 따른다. 악신이 깨어나지 않도록 달래고 봉인하던. 실제로도 마을 굿이라는 게, 결국 그 마을에 엮인 ‘집단무의식’이라는 ‘한’을 풀어내는, 어찌 보면 현대의 사이코드라마와 같은 역할이었으니.
마을의 봉두단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피와 절망 속 믿음이 응결된 창조의 장소이다. 그들이 믿는 ‘신’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절망과 공포가 물질화된 결과물이다. 이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의 기록 행위로 되살아난다. 다시 말해, 신은 인간의 언어와 기억의 부산물이다.
이러한 신화적 장치는 단순한 공포 설정이 아니다. 인간의 무의식, 특히 집단무의식 속 가장 어두운 영역—죽음, 공포, 절망—이 현실화될 때 신화가 탄생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인간은 절망할 때 신을 찾고 신을 부른다. 따라서 이 작품의 ‘신’은 인간이 가장 부정하고 싶은, 그러나 가장 진실한 자기 내면의 거울이다. 봉두단은 그 집단무의식의 물리적 형상이다. 실제로도 수많은 얼굴들이 엉겨붙은 덩어리였으니까(그렇다, 사실 우리의 무의식은 괴물이다).
주인공 치서는 기록의 의무를 가진 서리이지만, 그의 행위는 이 마을에서 ‘신’의 봉인을 해제하는 촉발점이 된다. 촌장의 “기록하시면 아니 되오. 그것이 다시 깨어난단 말이오.”라는 말은, 언어라는 관념이 실재를 재생시키는 순간, 기록은 신=괴물을 되살리는 주술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의 기록은 진실을 남기는 행위가 아니라, 신화를 다시 쓰는, ‘신’을 창조하는 행위다. 인간이 진실을 덮고 보존하려는 욕망 자체가 신화의 근원이 된다. 이 점에서 ‘기록’과 ‘문자’는 진실의 도구가 아니라 재앙의 매개이다. 마지막 문장 “목격자는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다음을 기다리는 증인이 될 뿐이다(혹시 데스티니2 게임 해보신 건 아니죠?).”는 이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기록자는 신의 창조자이자, 그 신에게 먹히는 목격자이다.
나 역시 신화란 인간이 ‘기록하고 믿기 시작할 때’ 되살아난다고 생각한다. 내가 연재 중인 [네오 에다]에서는 잊혀지고 소비되어 사라져 가는 북유럽의 신들이, 인간 작가의 ‘기록’에 의해 현대 사회에서 새 역할을 부여받으며 부활한다. 그 신들은 원전의 신화에서처럼 인간과 다시 공존하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간다. 인간은 진실을 남기려는 욕망으로 인해 스스로 신들을 다시 만들고, 그렇게 시대마다 다른 신화를 재생산한다고 본다.
그러나 [단피몽두]는 같은 전제를 전혀 다른 결론으로 이끈다. 이 작품에서 신은 인간의 창조 행위의 결과물이지만,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재앙이며 괴물일 따름이다. 인간의 피와 공포, 믿음이 엉겨 만들어진 존재로서의 신은, 인간의 집단무의식이 낳은 그림자이다. 즉, 인간이 진실을 기록하려는 순간, 자신이 가장 부정하고 싶은 진실—절망과 공포의 본질—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단피몽두]는 내가 생각하는 신화의 재생 개념과 문자적으로는 유사하지만, 의미적으로는 정반대의 방향을 취한다. 그래서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나의 신들은 인간이 잊었던 신성의 복원이며, 이 소설의 신은 인간이 잊고 싶었던 절망의 환생이다. 한쪽은 인간이 신화를 통해 삶의 신성함을 다시 쓰려는 시도이고, 다른 한쪽은 인간이 기록을 통해 스스로의 어둠을 다시 깨우는 과정이다. 따라서 [단피몽두]는 신화의 부활이 구원이 아닌 파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대에는 본래 신들의 이름은 함부로 쓰거나 부르지 못했다. 귀신얘기를 하면 귀신이 온다는 속설처럼,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신을 말하는 행위 자체가 신을 만든다”는 언어적 역설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