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의 스포일러 부분은 소설의 후반부도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을 먼저 보시고 읽는 것을 권합니다.
※ 본 리뷰에서 다룬 본작에 대한 해석은 리뷰어의 주관적 해석이고, 작가님의 공식 해석은 아닙니다.
브릿G에는 좋은 글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간혹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글들이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대개 다 읽었는데 밀려오는 감상에 비해 생각은 많아지지만, 정리는 되지 않아 작품을 뜯어보고 해체하고 탐구하고 싶어질 때 그렇습니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은 글로 써야 정리가 되는 법이고, 본작처럼 리뷰를 써서 감상을 남겨둬야 겠다고 마음먹은 작품에 대해 리뷰 공모중이라면, 작가와 독자가 서로의 시선을 교차시킬 수 있는 드문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간만에 리뷰를 위해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1. 민희와 유정
본작은 민희와 유정이라는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처음 읽으면서는 묘한 거리감이 느껴지고 둘의 관계는 이해보다는 관찰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 싶었는데, 남성 독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낯선 관계였기 때문이었구나- 싶었습니다. 남자들 사이에서도 그런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들 사이의 관계는 관계의 거리가 명확하고 종종 충돌이나 거리두기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여자들의 우정이나 유대는,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온도와 방향을 지닌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서로를 끌어안으면서도 한 발짝 밀어내고, 질투와 연민이 뒤섞여 있는 복잡한 감정이 파괴가 아니라 유대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듯 했습니다.
작품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되는데, 제 눈에는 1장의 민희와 유정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민희와 유정의 관계는 사장과 직원, 혹은 동창의 재회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공모자이자 경쟁자이고, 서로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거울 같은 존재처럼 보입니다. 민희는 유정에게서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 싶어 하고, 유정은 민희를 통해 예술가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투사합니다. 서로 동경과 질투가 동시에 작동하는 묘한 관계로 보였습니다.
왕따였던 민희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정의되고 부정당했던 인물입니다. 무슨 이유로 왕따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지만, 그 상처는 욕망으로 전환되고, 사업적 성공을 향해 달리고,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적인 추구로까지 이어진 듯 보입니다. 결핍에서 비롯한 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보입니다.
그런 민희가 유정을 고용한 것은 유정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미대지망생이었던 유정을 보며 과거와 다시 마주하면서 통제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민희는 유정을 ‘직원’으로 두면서도, ‘동창’이라는 관계를 뒤늦게 밝히고, ‘사장과 직원이 아니라 동등한 예술가’라며 ‘홀리’라는 새 이름을 부여합니다. 왕따였던 자신이 다시 권력의 위치에 서서 관계를 재구성하려는 민희에게 유정은 ‘과거의 자신을 구제하는 대상’인 동시에 ‘제압해야 할 타인’이 었고, 연민과 소유욕, 동질감과 제압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표출합니다.
그런 민희를 유정은 씁쓸해하면서도 거부하지는 못합니다. 민희가 자신을 ‘카이’로 명명하면서 능동적 정체성을 선택했다면, 유정은 민희로부터 ‘홀리’라는 이름을 타의적으로 부여받습니다. 왜 카이냐는 질문에 민희는 자신의 성인 ‘계’를 음차해서 ‘카이(Kai)’라고 하지만, 작품은 유정이 왜 ‘홀리’인지는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민희가 ‘계’씨라서 카이라길래 처음에는 ‘성(聖)’유정인줄 알았는데, 작품 후반부에 나타난 유정의 성은 ‘하’였습니다. Kai를 찾아보니 여러 언어에서 ‘열다’라는 뜻도 있고 ‘전사’라는 뜻도 있더군요. 성스러움을 뜻하는 홀리는 ‘희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유정은 별 저항없이 민희로부터 이름을 받아들입니다.
작품은 유정에게 좀 더 붙어 서술하면서 쓴 웃음을 짓는 유정을 자주 보여줍니다. 유정은 미대를 나왔지만, 중간에 웹디자인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예술의 문턱에서 물러난 사람입니다. 어쩌면 유정에게는 늘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라는 콤플렉스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민희도 예술이 아니라 상업의 영역에서 움직였고, 유정에게 민희는 그저 성공한 사장님 이상의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동대문 시장 상인에게 “예술가 흉내는 그만 내라”는 말을 듣고나서, 민희는 잘 나가던 쇼핑몰을 접어버리는 과감함을 보여줍니다. 대등한듯 대등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같이 영국을 가자는 민희의 일방적인 제안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민희가 가진 확신에 가까운 허세와 광기에서, 유정은 자신이 잃어버린 예술의 열정을 엿보았을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를 닮아갈수록 좁아지지만, 예술을 매개로 맺어진 두 친구 간의 유대는 연대라기보다는 흡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민희는 “같이” 하는 말을 쉽게 합니다. “같이 일하자”, “같이 여행하자”, “같이 예술하자.” 민희는 유정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고 싶어 하고, 유정은 민희의 세계에 들어가면서 자신을 잃어버린 듯 합니다. 민희는 유정을 끌어안으면서 삼켜버리고, 유정은 민희의 세계를 부정하면서도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서로의 고통을 공유하면서도, 결국 한 사람만 남는 구조. 그렇게 초반부 그들의 관계는 애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종의 포식 관계로 보였습니다.
“예술가로 자리 잡으라”는 동대문 상인의 말 이후, 민희는 상업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 ‘진짜 예술가의 삶’을 욕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여행 경비를 자신이 낸다며 일방적으로 결정하면서 민희는 현실의 질서를 벗어나 예술의 서사로 이동합니다. 유정을 데리고.
2. 빈 액자, 앙투앙
작품의 제목인 앙투앙은 극의 핵심 사건을 담당하는 중요한 아이템입니다. 민희와 유정은 앙투앙 액자를 만나기 위해 영국으로 갔고, 2장은 오롯이 민희와 유정이 앙투앙 액자를 얻는 장면이고,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3장은 앙투앙을 통한 유정과 민희의 기묘한 경험에 관한 내용입니다. 타로/사이코메트리 라는 명함을 준 오로라라는 여인이 등장해 “그건 지금 주인을 고르고 있다. 그걸 가진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질 것이다”라고까지 경고하지만 두 사람은 끝내 앙투앙을 가지고 갑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앙투앙은 어떤 물건이었을까요.
앙투안은 단순한 오컬트 오브제가 아니라 예술 그 자체이거나 혹은 예술의 공허함을 시각화한 장치입니다. 빈 액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액자를 보는 이의 시선을 구속합니다. 앙투앙에 사로잡힌 민희와 유정은 앙투앙에게서 서로 다른 것을 보고, 각각 다른 형태로 예속됩니다. 민희는 보석과 골동품,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고, 유정은 피와 공포를 봅니다. 보는 이마다 다른 것을 비추는 앙투안은, 결국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예술을 상징합니다. 작품은 오로라의 입을 빌려 앙투앙은 라틴어로 ‘관’이라는 뜻도 있다고 말합니다. 앙투앙=관=예술은, 인간을 그 안에 가두어 버립니다. 어쩌면, 예술이란 영원성을 얻기 위해 생명을 대가로 삼는 의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본작은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플롯인만큼, 과연 앙투앙은 무엇인가-보다는 앙투앙은 유정과 민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부각시킵니다.
민희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 했고, 예술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물이었지만, 끝내 예술에게 속박당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민희가 외치는 “나는 나를 채울 필요가 없다. 이미 내가 예술이야.”라는 선언을 처음에는 자기 완성의 언어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다 읽고 다시 보니, 오히려 자기 소멸의 서약이었습니다. 민희는 예술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된다고 믿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과정에서 자신이란 존재는 사라졌습니다. 민희는 앙투안을 손에 넣은 순간부터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감각을 하나씩 버려왔습니다. 식음도 거부하고, 세상과 단절된 채 앙투안을 보는 행위에만 몰두했습니다. 이 시점의 민희는 예술의 주체가 아니라 예술의 일부가 되어갑니다.
앙투안은 ‘빈 액자’입니다. 그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의미가 생깁니다.
민희가 앙투안 속에서 아름다운 골동품, 보석, 황금빛 세공품들을 봤을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현실과 예술의 경계 위에 서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민희는 영국에 와서 앙투앙을 만나기 전에도 집에 각종 앤티크 장식을 곳곳에 두고 있었습니다. 민희가 본 것은 예술 자체라기보다 예술이 약속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때의 민희는 아직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민희는 예술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했고, 왕따였던 과거의 결핍, 인정받지 못했던 자아를 예술의 눈으로 본 세상을 통해 보상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앙투앙에게서 민희가 본 아름다운 골동품들은, 예술이 인간에게 던져주는 거짓된 구원이자 환상에 불과합니다. 민희를 예술의 포로로 만들기 위한 유혹의 장식물입니다. 민희는 현실의 결핍을 예술의 형식적인 아름다움로 채우려는 인물이었습니다. 앙투안은 이를 간파하고 그 결핍을 달래기 위해 환상을 보여줍니다. 너는 아름다움을 느낄 자격이 있다고. 그렇게 민희는 식음도 전폐하고 앙투앙만 바라봅니다. 민희에게 예술은 아름다움을 향한 여정에서 비어 있음을 숭배하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살아 있는 자로서의 민희는 사라지고, 예술의 완성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제물이 되어갑니다.
그러자 앙투안은 민희에게 너 자신이 되라-는 말을 돌려줍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자존감을 되찾는 자기 암시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공허한 주문처럼 보입니다. 애초에 민희는 과거의 자신을 지우고 완벽한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나를 비워서 완벽한 틀만 남기겠다는 주문이 되어, 완벽한 껍데기로 남고자 합니다. 끝에는 자신의 실체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는 나는 나를 채울 필요가 없다는 선언을 합니다. 민희는 이제 더 이상 욕망하지도, 느끼지도 않습니다. 완성된 오브제로서, 빈 액자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 대가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평온을 얻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텅 비어버린 민희는 앙투안에게 더 이상 먹을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앙투앙은 민희 옆에 있는 유정을 봅니다. 유정이 앙투안에서 본 건 죽음의 이미지입니다. 유정은 미대를 나왔지만 모종의 이유로 웹디자인으로 진로를 틀었습니다. 유정은 늘 통장 잔고를 생각해야 합니다. 유정은 예술의 내부 구조를 알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무엇을 먹고 유지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유정은 민희처럼 예술의 표면을 향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유정은 예술의 결과가 아닌 재료를 보았습니다. 예술은 인간의 감정, 희생, 죽음을 소재로 삼아 빚어진 산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정은 예술을 욕망합니다. 현실과 예술의 경계에서 망설이지만 예술을 갈망하는 인간입니다. 앙투안을 보려 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시선을 피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예술은 결핍을 먹고 자랍니다. 유정이 느끼는 불안, 동경, 두려움은 모두 예술의 먹이감입니다. 앙투안(=예술)이 선택하는 건, 채워넣을 감정과 욕망, 결핍을 가진 인간입니다. 유정이 보고 싶지 않은데도 보는 순간, 앙투안은 유정을 삼켜버립니다. 예술은 갈망의 틈을 보이는 인간을 놓치지 않고 끌어들입니다.
유정과 민희의 앙투앙과의 기묘한 경험은 한발짝 더 나아갑니다.
유정이 앙투안에게 잡아먹히는 순간, 민희는 오히려 정신을 차립니다. 단순히 정신이 돌아온 상태라기보다, 민희는 예술이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고, 예술이라는 프레임 바깥에서 섰습니다. 액자 속에서 세탁기 속 빨래처럼 돌아가는 유정을 보며 민희는 어쩌면 예술이 인간을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예술의 이면에 있는 진실을 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을 향한 믿음이 붕괴됩니다. 신앙이 무너지고, 앙투안을 부숩니다. 예술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던 자기 자신을 부수어 버립니다. 유정이 잡아먹힌 순간, 민희는 예술 밖으로 떨어졌고, 비로소 다시 예술을 보는 자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것을 보지 않습니다.
반면 유정은 앙투안에게 삼켜져 더 이상 세상을 보는 존재가 아니라, 예술의 내부에서 보여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유정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본 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몸으로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술은 감정을 정제하고, 고통을 형태로 만든 결과물입니다. 유정은 그런 과정에 갇혔다가 나왔습니다. 앙투안을 부순 민희의 행위는 유정을 살린 동시에 유정을 다시 태어나게 했습니다. 현실의 세계에서 민희의 그림자이자 보조적 존재였던 유정은 앙투안의 내부를 경험한 뒤에는 예술의 진실을 본 사람으로서 독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민희는 예술을 깨뜨림으로써 인간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감각을 잃은 자가 되었고, 유정은 살아남았지만 앙투안의 저주를 이어받은 자가 됩니다. 그렇게 앙투안은 둘을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3. 예술이라는 환상
예술품을 소유하면 자신의 예술성이 고취되는 것일까. 작중 민희는 앙투안을 처음 봤을 때, 빈 액자에서 ‘완벽함’을 느낍니다. 결핍에서 완성을 느낍니다. 예술은 언제나 결핍에서 출발하고 그 결핍을 채우려는 행위가 오히려 더 큰 공허를 낳는 법이지만, 민희는 그 공허를 사랑했습니다. 민희는 그 빈 액자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이 완벽해지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예술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유정은 민희와 달리, 처음부터 예술의 세계에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미대 출신이지만 예술계를 떠나 현실적인 디자인 일을 택했고, 앙투안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안에서 무언가 살아 있는 것을 감지합니다. 하지만 민희와 함께 하면서, 그 세계로 다시 조금씩 끌려 들어갑니다. 앙투안을 보지 않으려 하면서도 눈을 감지 못했습니다.
앙투안을 만나고 난 이후 그녀들은 어땠을까요.
예술을 가지면 내가 완성된다고 믿는 착각, 아름다움을 소비함으로써 자기 존재가 고양된다고 믿는 자기기만. 그 환상이 깨진 민희는 오히려 확신을 가집니다. 남은 것은 오직 공허뿐이지만, 예술가를 흉내내는 사업가에게 ‘너 자신이 되어라’는 말은 그 정체성을 끝없이 상품화하고 증식시키라는 명령으로 변했습니다. 민희가 세운 “BE ME BAKERY”의 빵은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기름 맛을 가졌습니다. 유정은 한 입 베어 물고 먹기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런 빵을 먹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줄을 서서 몇 시간을 기다립니다. 민희는 상품이 되어버린 거짓된 환상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파는 현실 세계를 살면서 평온함을 얻었습니다.
유정은 반대입니다. 예술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직접 경험했고, 그 안에 들어가 본 사람입니다. 유정은 자신의 전시회가 실패한 것에 대해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자조합니다. 소설은 구체적으로 전시회의 실패 이유를 설명하진 않지만 이미지는 보여줍니다. 유정의 작품은 예술이 인간의 고통을 먹고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사람들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예술의 진실을 본 사람은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없고, 결국 유정은 그리지 않으면 앙투앙에게는 먹힐 것처럼, 현실과 괴리되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그림을 계속해서 그리며 진짜 예술과 함께 사는 형벌을 짊어지게 됩니다.
민희는 예술의 껍데기를 배워 세상 속에서 성공했고, 유정은 예술의 속살을 봐 버려 세상 속에서 고립되었습니다. 하나는 모든 걸 비워서 죽은 듯 평온해졌고 다른 하나는 모든 걸 안아서 불안하게 살아남아 생동감을 얻었습니다.
결국 작품 속의 ‘앙투안’은 결국 두 인물의 관계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담으려다 서로에게 갇히는 액자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본작은 앙투안은 초기버전과는 비슷하면서도 꽤 다른, 작가님이 개고한 새로운 버전이라는 것입니다. 초기 버전은 기이한 체험이야기가 주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버전도 좋았지만 두 인물의 관계에 주안을 두고 대비를 보여주는 과감한 개고를 해주신 작가님께 감사합니다. 리뷰를 쓰기위해 작중 언급되는 <성 앙투앙의 유혹>에 대해서도 찾아보았는데,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성 앙투앙의 유혹> 초고를 썼지만 주변인들에게 관심받지 못 했고, 2차례의 개고를 거쳐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건 세번째 판본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본작도 그럴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분야라,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고, 요소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끼워 맞추느라 제 리뷰 중 가장 긴 리뷰가 되었습니다. 제 리뷰가 늘 그렇듯 작가님의 의도를 벗어난 오버일수도 있습니다. 늘 리뷰를 쓸 때마다 오독한 감상을 쓰는건 아닌지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럼에도 작가님이나 이 리뷰를 보신 분들이 제 해석이 맘에 들길 바라면서 리뷰를 마칩니다.
재밌게 읽었고, 자유롭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즐거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