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의 스포일러 부분은 소설의 후반부도 다루고 있습니다. 스포일러 부분은 감상 후 보는 것을 권합니다.
스크롤을 다 내렸을 때, 동시에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면서 ‘이 작품은 나중에 글로 감상을 정리해봐야겠다’는 글이 종종 있습니다. 특히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와 의도가 비교적 선명하게 다가올 때, 그리고 그 감상이 오랜 여운을 남기면 더욱 그렇습니다. 저에겐 본작이 그랬습니다.
1. 장르에 대해
본작은 장르는 추리/스릴러라고 분류되어 있지만, 메타적 요소도 강해서 추리/스릴러 작품이라고 한정해서 접근하면 작가가 의도한 재미를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특히 추리극으로 접근하면 ‘나’가 범인일까, 아닐까라는 1차원적인 의문에 갇혀버릴지도 모릅니다. 독자를 화자의 입장에 가두고 불완전한 정보만 주는 편면적 서술을 통해서 심리적 압박의 공백 효과를 극대화하고, 중심 사건이 되는 범죄 여부를 증거보다 심리 묘사와 반응 변화를 통해 보여주면서 심리적 긴장감을 증폭시킵니다. 몰입과 거리감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속삭이듯 서서히 조여오는 서스펜스가 흥미진진합니다. 탁월한 서술방법을 채택한 심리 서스펜스라고 해야할까요.
전 스크롤을 다 내리고 마지막 문장까지 눈에 들어왔을 때, 문득 “롤리타”가 떠올랐습니다.
“롤리타”의 장르가 무엇이냐고 한다면 시대에 따라 세부적인 분류는 달랐던 것 같지만, 크게 보면 서사실험적인 심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전 본작을 보고, 작가님은 “롤리타”에서의 메타적인 실험 요소를 세련되게 뒤집는 시도를 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롤리타”는 존 레이 박사의 서문을 통해 험버트의 글을 사망한 피고인의 고백문으로 소개하고 처음부터 살인죄로 기소된 것을 알려주고 시작하는데도, 편향과 정보 통제, 자기연민으로 점철된 험버트의 글을 따라 읽으면 이 신뢰할 수 없는 화자가 독자 마음속 저울에 자신의 무게추를 올려놓는 것을 느낍니다. 배심원에게 쓰는 편지라는 형식을 빌어 독자에게 서사 실험을 합니다. 이미 범죄자인 것을 알았고 점차 비극으로 포장된 추악함이 새어나오지만, 책을 덮었을 때는 이미 마냥 거리를 두기도 어려운 상태로 끌어내려져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본작에서는 반대로 1인칭 서술을 통해 ‘나’에 이입하도록 만들어두고는 서서히 ‘나’는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나’는 어떤 캐릭터인지에 집중하여 보여주면서 서서히 ‘나’에게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한국어로 작성되어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독자를 대상으로, 문화적, 언어적 차이에 따른 오해에 대한 공감으로 시작하여 놓고, ‘정말로 그런 의미로 말했다고?’라는 의문을 자아내게 하다가, 중반부에 가서야 1급 살인죄의 피의자로서 수사를 받는 상황임을 알려주면서 거리감을 확 던져줍니다.
편면적 서술방식 덕분에 화자인 ‘나’의 머릿속에 꼭 붙어서 상황을 보지만, 동시에 상대의 말을 볼 수 없어 폐쇄감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독자의 도덕적 판단기준을 끌어들이고 ‘나’를 계속 믿어줄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초반부에 ‘나’와 형성된 유대감은 이미 심증이 굳어져가는 와중에도, 일말의 희망으로 ‘나’를 완전히 놓지 못하게 만듭니다. ‘나’의 캐릭터에 집중하다보면, ‘나’에게서 정이 떨어져서 어느 순간 ‘나’에게서 떨어져 나와 ‘청자’가 되어, 아예 독자가 수사관이 되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저는 ‘나’를 마지막까지 완전히 놓지는 못한 쪽입니다.
“롤리타”에서 험버트에 대한 감정과는 반대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피고인을 심판하는 배심원으로서, 혹은 이미 사망한 사람이 남긴 편지를 한발짝 떨어져서 보다가 어느 새 험버트의 글에 걸려 모호함을 오래 유지하는 방식 대신 처음부터 ‘나’를 체험하게 해놓고는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나’의 자기합리화, 변명, 왜곡 과정을 체험시키며 일종의 심리적 공모자를 만들어 놓고, 불신을 강화시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나’를 완전히 놓지 못한 탓에 배신감과 불쾌한 확신이 뒤섞이면서, 그 불편함이 작품의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2. 미필적 고의, 1급 살인
작가님이 이 작품을 위해 어디까지 연구를 했을까 싶었던 부분입니다. 소설은 문화적, 언어적 차이로 인한 오해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중반부에 이르러 ‘1급 살인죄’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분위기가 급격히 반전됩니다. 본격적으로 ‘나’를 믿을 수 없는 화자로 보기 시작하게 되면서, 뇌 한쪽은 “‘나’는 살인자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지배하게 됩니다. 여기서 ‘나’를 완전히 벗어나 공백의 수사관이 되는 순간 전반부와는 또 다른 편향에 의해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점차 침착함을 잃어가는 ‘나’의 태도를 통해 심증은 ‘나’에게 많이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그럼에도 ‘나’를 완전히 놓지 못하게 하는 요인에는 우리나라 형법과는 달리 ‘1급 살인’과 ‘2급 살인’을 구분하는 미국 형사법 체계도 한 몫한다고 봅니다.
중살인과 보통살인을 구별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직접적이든 미필적이든 살해의 고의가 있고 사람을 죽였으면 살인죄로 규율합니다. 양형인자의 조사를 위해서 범행의 동기를 확인은 하지만, 그렇다고 적용되는 조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1급 살인으로 기소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요소인 고의와 더불어 ‘계획성’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1급 살인죄’라는 단어의 등장과 함께 그 전에 공백의 대화자가 물었던 질문들은 모두 살인의 동기와 계획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나’와 함께 서서히 그 날의 사건을 향해 조여들어오는 수사의 긴장감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나’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기도 전에 ‘살인’에 대해서는 자백을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피해자인 제이크가 땅콩 알러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땅콩 알러지가 있는 사람은 점막에 의한 알러젠 흡수로 알러지에 의한 아나필락시스로 사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걸 알면서도 땅콩버터가 함유된 M&Ms 초콜릿을 구입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결과 발생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용인하는 심리 상태” 즉, 미필적 고의는 충분히 인정되는 진술입니다. ‘나’는 농담에 불과했다고 변명하면서 무죄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저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현출된 진술 상태에서, ‘나’의 변호인으로서는 “‘나’는 케일럽에게 ‘그 짓’을 시키기 전에. 케일럽이 땅콩버터맛 M&M초콜릿을 먹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유일한 무죄 전략으로 보입니다. 그조차도 충분히 예견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배심원 설득이 가능할지, 다소 무모해보입니다.
하지만 1급 살인죄의 구성요건인 ‘계획살인’에 해당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했을 뿐 농담에 불과했다는 ‘나’의 모든 변명들은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고, 우발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2급 살인으로 혐의를 변경할 여지가 생기게 됩니다. 작가님이 여기까지 의도한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주석까지 달아 둔 법률용어를 마냥 쓰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입니다.
3. 언어의 왜곡, 그리고 차별
롤리타가 화자의 언어를 통해 언어가 어떻게 현실을 왜곡하는지-를 실험했다면, 본작은 한국어와 영어를 놓고 작중에서도 언어가 왜곡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그러한 언어의 왜곡이 현실의 독자에게는 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실험하는 듯 합니다. 두 언어와 문화권의 차이가 초반부 몰입의 소재인만큼, 작가가 공을 들여 짠 것이 느껴집니다.
롤리타가 권력과 성적 착취를 폭로하는 불편한 성격도 가졌다면, 본작은 ‘차별’이라는 불편한 주제를 간결하고 흥미롭게 보여주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는 시종일관 “영어와 한국어의 문화적 차이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자신의 발언을 희석시킵니다. 언어 차이를 방패로 삼아 책임을 회피합니다. ‘문화 차이’라는 말이 종종 진짜 차이가 아니라, 불평등·차별·폭력적 행위의 변명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또한 다문화 환경에서 언어·문화의 차이는 때로는 법적 책임이나 도덕적 책임을 모호하게 만드는 회색 지대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나’는 작중 초반 케일럽과의 관계를 동성애가 아니라 오해라고 하고 양성애자라는 소문에 대해서도 극구 부인합니다. 미국은 보다 개방적이라는 편견을 드러내면서도, 강제적 아웃팅과 그에 따른 사회적 낙인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극이 전개될 수록 ‘나’는 왜 그렇게 케일럽과의 동성애를 부인했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되지만, 전체적인 사건의 맥락에서는 ‘동성 관계’가 범죄성을 강화하는 편견 속에 놓여있다는 인상도 남아 있습니다. 한편 “성적 농담이었다”는 ‘나’의 변명은 성소수자 혐오적인 사회에서 성적 표현이 가진 위험성과, 그것이 범죄에서 어떻게 왜곡·이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로도 읽힙니다.
‘나’는 교환학생이라는 지위 때문에 언어·문화적 소수자입니다. 그렇기에 수사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범죄 사건에서는 ‘나’는 권력을 행사한 권력자임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라는 이중적 위치는 인종적 소수자라 해도 성별이나 성적 지향, 사건 맥락에 따라 권력자가 될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더군다나 ‘나’와 케일럽의 관계, 제이크의 죽음이 ‘단순 알러지 사고’가 아니라 ‘타인의 몸을 도구로 이용한 행위의 결과’라는 점에서, 소수자 집단 내부에서도 폭력이 존재한다는 불편한 진실도 엿보입니다.
마지막 대사 “What if you showed him what you’re good at?”에 대해서는 부연설명이 없습니다. 직역하면, “네가 잘하는 걸 그에게 보여주는 게 어때?”이지만, 이미 그 상황에서는 한국어로 번역을 해도 성적 은유와 성적 행동의 지시라는 의도가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을 정도입니다. 사실 ‘나’는 짖궂은 호기심이었을 뿐이라고 변명할 뿐 ‘성적인 행동을 지시한 사실’ 자체는 이미 자인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작가님은 언어가 단순한 농담을 넘어, 행동과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실질적 힘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무궁무진하고 다양하게 뻗어나가는 것이 소설의 매력이지만, 본작처럼 의도가 드러나는 작품에서는 작가의 의도를 음미하는 것이 괜찮은 감상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 어지간하면 설명서를 충분히 읽고, 튜토리얼을 먼저 하며, 정해진 레시피를 지키는 편입니다. 창작자가 만들어 놓은 방법은 가장 재밌게, 맛있게 즐길 수 있도록 창작자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결과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리뷰를 쓰기로 마음을 먹은 작품에 대해서는 오롯이 제 생각을 글로 정리하지 못하고 선입견이 생길까봐 리뷰를 보지 않는데, 이미 3건의 리뷰가 있길래, 사실은 혼자 오독하고 내 편견으로 글을 써내려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위와 같은 심리 상태를 거치면서 읽었고, 다 읽었을 때 만족감이 상당했기 때문에 감히 제 감상법을 공유해봅니다.
브릿G 팀이 아무 작품이나 추천하는 게 아니었어요.
재밌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 글, 잘 읽었습니다.